"한번 읽어보고 크게 웃어줬으면 좋겠네요. 우파에 대한 희롱이나 조소도 들어있지만 바람직한 우파상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등 1990년대 내내 전위와 포르노의 경계선을 위태롭게 넘나들며, 권력과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낱낱이 까발렸던 작가 장정일(47)씨. '사기 열전'을 패러디한 중편 역사소설 <중국에서 온 편지> 이후 10년 간 소설을 쓰지 않았던 그가 새 장편소설 <구월의 이틀> (랜덤하우스코리아 발행)을 내놨다. 구월의> 중국에서> 내게> 너에게>
그는 7년 동안 이야기를 품고 있다가 지난 여름 불과 45일 만에 소설을 탈고했다고 했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지만, 독특하게 뒤집힌 성장소설이다. "이문열씨의 <젊은 날의 초상> 을 제외하고는 1980~90년대의 성장소설은 모두 현실 모순에 고민하던 좌파 젊은이들이 예술의 길로 뛰어드는 '예술가 소설'이지요. 젊은>
현실정치에 몸 담는 것은 구렁텅이에 발을 디디는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고상한 예술세계로 투신하겠다는 건데, 그건 패배자들의 허위의식이라고 봅니다.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으나 그것을 발로 차고 나와 정치의 길로 뛰어드는 우파 젊은이의 성장통에 주목해봤습니다."
소설은 참여정부가 출범했던 2003년 봄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이 이뤄졌던 이듬해 봄까지 1년 간을 배경으로, 고향도 출신성분도 상반된 두 명의 대학 신입생 '금'과 '은'이 성적ㆍ이념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의 혼란과 방황을 그렸다.
광주 출신의 금은 시민운동을 하다가 참여정부가 탄생하자 대통령 보좌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아버지를 둔 정치학도이고, 부산 출신의 은은 사업가인 아버지와 병원장 검사 교수 등 상류층 친척들이 있지만 시적 재능이 비상한 젊은이다. 노동의 숭고함, 일하는 사람의 가치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금, 반대로 "부자 혐오는 문명파괴"라는 집안 어른들의 훈계를 내면화해온 은은 태생적으로 정반대의 세계관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작가 장씨가 보기에 그러나 이들은 똑같이 '고속도로 위에 내던져진 고아들' 같은 존재다. 좌와 우를 막론하고 기성세대의 행태는 이들에게 환멸감을 안겨줄 뿐이다. 금은 '생활능력 없는 운동권 백수'라는 보수언론의 공격 때문에 아버지가 자살하자 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문학이 과연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장씨는 회의적이다. "아버지가 패배했으면 정치로 뛰어들어야죠. 예술은 문명의 사치품에 불과해요. 80~90년대 예술로 뛰어든 좌파들에게 권력이나 돈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신 포도'였지요. 돈과 권력이 있으면 집에 피카소 그림을 걸어놓고 정경화를 초대해 연주회를 열면 됩니다. 현실을 보세요. '마스크 법'이니 뭐니 만드는 신지호 한 명은 열 명의 황석영보다 힘이 있습니다."
은에게는 친일과 독재에 대한 부역이라는 원죄를 지닌 올드 라이트, 좌파 운동권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는 뉴 라이트 등 기존 우파는 롤 모델이 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자기반성 능력을 지닌 우파 청년 은에 대한 작가 장씨의 애정은 각별하다.
은의 정신적 대부인 '거북선생'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듣다가 자신이 70~80년대 '빨갱이'들한테 어용이니 회색분자니 조롱 당한 것이 서럽다며 눈물을 흘린다. "호의호식하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옥'에 있었을 뿐이면서 뭐가 그렇게 억울한 것일까? 노망도 참 단단히 났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거북선생을 조롱하며 자긍심을 갖고 자기 정립을 하는 우파가 되기를 다짐하는 은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장씨에 따르면 은은 자신의 분신과 같다. "저같은 사람을 좌파라고 부르기에, 우파 탄생의 배경을 탐구해 보고 싶었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소년원까지 갔다온 막장인생이었지만 구원을 받은 저로서는 비록 우파이지만 자기계발, 자기반성 능력을 갖춘 은에게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라 텍스트는 다양한 의미의 결을 품고 있다. 은의 정신적 멘토들이 전개하는 논리정연한 예술론과 사회론은 훌륭한 교양소설의 덕목이며, 이념의 대립과 화해를 다룬다는 점에서 사회소설로도 읽힌다. 금과 은의 동성애를 암시하는 여러 문학적 장치들이 숨어있는 것도 흥미롭다. 장씨는 당초 '금과 은'으로 제목을 정했으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춘시절'을 의미하는 시인 류시화의 같은 제목의 시에서 힌트를 얻어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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