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코리안시리즈 열기(10.16~24)로 후끈 달아오를 무렵. 승리의 주역인 그들은 어김없이 각자 튀김을 튀기고, 와인을 따르고, 손님을 안내하고,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한 몸이었던 그날을 반추하는 웃음은 더러 실없고 얼추 서글펐다. 일상의 진자(振子)는 녹색다이아몬드를 탐하던 찌릿한 관자놀이와 달뜬 맥박을 야멸차게 재웠다.
2009년 10월 14일, 달력에서 저만치 멀어진 그날이 그들에겐 환희다. 조선호텔의 지승호(39ㆍ컴파스로즈 지배인) 조숭원(37ㆍ인사) 과장, 김종걸(36ㆍ예산) 계장, 양원모(30ㆍ소믈리에) 김승범(28ㆍ튀김 요리) 사원, 그리고 지면관계상 뭉뚱그려야 하는 나머지 31인. 그들의 액면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코리안시리즈 운운하는 건 일종의 함정이자 과대포장이다.
'조선호텔야구단 도브스(DOVES), 2009호텔리그(10개 팀) 우승' 정도면 차고 넘칠 사건을 뒷얘기까지 들춰내고자 하는 건 그들의 투박한 열정 탓이다. 2시간 넘게 말의 난타를 당하자 홀연 장자(莊子)의 나비의 꿈이 떠올랐다. '활력 넘치는 얘기 속 야구선수가 그들인가, 말쑥한 차림의 호텔 직원이 그들인가.' 그들의 사연을 한 폭 삶을 빼쐈다는 야구에 빗댄다.
1~3회: 지루한 탐색전
2001년 9월 인사부에 홀로 야구동호회를 신청했다. 무식한(?) 축구는 몰라도 야구는 늙으면 하기 힘들다. 죽기 전에 하자. 방이 붙자 60명이 신청했다. 한달 회비가 5만원이라고 했더니 10명도 안 남았다. 4만원으로 깎고, 각개전투로 꼬드겼다(지승호).
'LG트윈스는 왜 허구한 날 빌빌댈까. 내가 해도 그보다는 잘하겠다.' 락커에서 늘 구시렁대다 덜컥 스카우트 당했다. 투수하겠다고 우겼다. 2003년 인천에서 선발 등판해 2이닝 동안 10안타 맞고 12점 내줬다. 어렵사리 모신 장모는 "왜 자네가 던진 공은 다 치나"라며 혀를 끌끌 찼다. '난타 김'이란 별명을 얻었다(김종걸).
우연히 부인 친구의 남편과 술을 마시는데 야구 얘기가 나왔다. 몸이 비대해지던 참에 잘됐다 싶어 의기투합했다. 뜬 공도 못 잡았다. 타석에서 흠칫 장타를 때리고 흐뭇했다. 주전을 꿰차자!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가 싫다는 뭇 여성과 달리 '직장에서 야구하는 남편'이 밉다는 아내는 그날 운명적인 만남을 주선한 친구와 의절하다시피 했다(조숭원).
초등학교 시절 감독이 장비를 다 사줄 정도로 '호타준족'이었다. 장사하는 엄마가 "뒷바라지 못한다"고 몽땅 싸 들고가 감독에게 반납했다. 소믈리에가 됐지만 이루지 못한 꿈이 늘 명치를 눌렀다. 입사했는데 지승호 과장(그는 팀의 실질적 구단주다)이 업무적인 건 안 물어보고 야구 좋아하냐고 물었다. 바로 입단했다(양원모).
4~6회: 승패의 분수령
돈 지랄이다. 매일 은퇴선수 초빙강습 2시간 10만원, 경기장 대여료 10만원, 리그 가입비 300만원, 유니폼 10만원, 야구화 7만원, 헬멧 5만원, 글로브 30만원, 배트 50만원…. 그래도 한다(그보다 돈 많이 드는 취미도 얼마든 있다). 엄동설한도 거르지 않고 새벽 한강 둔치에서 훈련한다. 우리의 1원칙은 '친목도모'가 아니라 '제대로 야구하자' 니까(지).
선배 동료 눈치가 보이는 건 사실이다. 경기가 있는 주말에 근무가 걸리면 도리가 없다. 소싯적에 야구깨나 했다는 호언은 허언이 됐다. 장난이 아니다. 새벽에 훈련 및 경기하고 오후에 출근했다. 오히려 컨디션이 좋다. 술도 덜 마신다. 업종(관리 홀 조리 마케팅 등)이 달라 서먹한 부서간 벽도 무너졌다. 호랑이 과장도, 주눅드는 신입도 경기장에선 그저 형 동생이니까. 무엇보다 꿈을 이루지 않았나. 입단 첫해 팀 내 신인왕과 MVP를 거머쥐었다(양).
서른 중반인데 후보라 짐을 날랐다. 그리고 2007년 첫 완봉승(김승범은 이 경기를 보고 감격해 입단했다. 장모는 없었다)을 거뒀다. 그 해 시즌 방어율은 0.89, 다승왕도 꿰찼다. 주말마다 새벽이슬을 뒤집어쓰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상패와 트로피가 쌓였다. 아내 등쌀이 무서워 구석에 처박았다. 하긴 아내의 배려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겠는가(종걸).
7~8회: 승리의 조건
프로야구 2군 수준(70~80경기)에 육박하는 시즌 50경기를 소화한다. 업무 걱정하지 마라. 야구는 전략, 일도 삶도 전략이다. 타자와 수비수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게 관건, 타이밍을 놓치면 진다. 사전분석, 교체시기 조율, 다음 경기 반영 등은 업무와 고객서비스에도 적용된다. 야구는 한 명이 실수하면 팀 전체가 박살이다. 회사 조직도 어차피 하나의 팀이다(조).
집중과 긴장은 야구의 묘미다. 요리도 마찬가지. 재료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까딱 방심하면 위험에 노출된다. 투구를 끝까지 쫓듯이 튀김을 튀길 때도 심혈을 기울인다. 역전홈런의 짜릿함을 떠올리며(승범).
忖側?공을 던지지 않으면 (경기를)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다. 게다가 경기장 가장 높은 곳에 서있다. 경기를 리드하는 지혜와 자신감은 회사 일할 때도 퍼뜩퍼뜩 떠오른다. 강속구를 지녔어도 제구(컨트롤)가 안되면 2류다. 제구는 인간관계다. 가족과 나, 회사와 나, 삶과 나…(종걸).
그리고 끝나지 않은 9회
도브스는 지난달 14일 특1급 호텔리그 결승전에서 상대(인터컨티넨탈)를 17대15로 누르고 우승했다. 선발 김종걸은 150개의 공을 던졌다. 조숭원과 김승범(각 5타수3안타)은 고비 때마다 홈런을 날렸다. 올 한해 친 안타 수보다 많은 4타수4안타를 몰아친 9번 타자 지승호는 공격의 불씨를 상위타선으로 이어가게 한 공으로 리그 MVP가 됐다. 물론 우승보너스는커녕 휴가도 없다.
그러나 아직 9회 말이 남았다. 그들은 인터뷰 중간중간 어지간히 하나 둘 자리를 비우고 채웠다. 회의에도 가야하고, 급한 일도 처리해야 하고, 상사 눈치도 살펴야 하는 천상 직장인인 까닭이다. 그 빽빽한 일상의 틈새를 야구로 메워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은 여간 해선 어림없다.
"멋진 안타, 멋진 수비, 멋진 탈삼진 하나면 영영 떠날 수 없다"(조)는 야구계, 그러나 마지막 회의 승부를 펼쳐야 할 곳은 가정 직장 인생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역시 제구력이 관건. 그래서 그들의 야구는 프로보다 아름답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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