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욕망에서 비롯되죠. 현대인에게 욕망은 대부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비롯된 것이죠. 이 소설은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이기호(37)씨의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 (현대문학 발행)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른 채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이씨는 주인공이 이유도 모르는 채 소송에 휘말리고 영문 모를 죽음을 당하는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 을 읽다가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B급 문화에서 길어올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소설 쓰기의 엄숙함을 전복시키는 유쾌한 글쓰기를 선보여왔던 이씨의 첫 장편소설이다. 형식의 변화 때문인지, 아니면 무거운 주제 때문인지 그의 소설이 전체적으로 차분해졌다. 심판> 사과는>
주인공은 복지시설에 수감돼 있던 시봉과 진만. 복지사들이 주는 정체불명의 알약을 먹으며 양말 포장을 하는 이들은 매일 복지사들에게서 "네 죄가 뭔지 아느냐?"라는 질문과 함께 폭행을 당한다. 쇠파이프로 허벅지를 두들겨 맞고, 군홧발로 옆구리를 밟히는 무자비한 폭력 세례를 받은 뒤 이들은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 반문하지만, 그들의 질문은 폭력의 근인에 대한 탐색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그저 고백을 먼저 해야 매를 덜 맞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이들은 먼저 죄를 고백하고, 죄를 짓는 방식을 택한다.
한 수감인의 내부 고발로 복지시설의 실상이 외부로 알려지고 세상 밖으로 나온 이들이 택한 직업은 죄 지은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고 사과를 대신해주는 '사과 대행업'이다.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죄 지은 일 없으세요?" "사과하실 일 없으신가요?" "염가로 사과해 드립니다"라고 외치고 다니는 이들의 모습은 헛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죄 많은 세상, 의뢰인 대신 욕을 먹거나 맞는 일도 마다않는 '일급 사과 전문가'인 이들에게는 일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순탄하던 이들의 '사과 대행업'은 "대신 죽어야 사과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사과 받기를 완강히 거절하는 한 여인을 만나면서 난관에 부딪힌다.
소설은 인간 내면 속에 숨겨진 죄의식의 탐구, 폭력의 내면화와 폭력의 순환, 문명 뒤에 숨겨진 폭력의 문제 등 사뭇 진지한 주제들을 품고 있다. 다양한 알레고리들은 그 주제들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한다. 폭력을 행사한 뒤 단정하게 머리를 정돈하는 흰 가운을 입은 복지사는 문명ㆍ위생으로 포장된 세계 이면의 폭력을, 처음에는 알약을 먹고 어지러워하다가 나중에는 알약이 없으면 어지럼증을 느끼는 시봉과 진만은 체제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고 통치 전략에 순응하는 인간형을 상징한다.
소설의 중심 주제인 '죄의식의 본질'에 대해 이씨는 말한다. "카프카는 죄는 제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죄가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유없이 사과를 거듭하는 멍청한 두 주인공이 느끼는 죄의식은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된 것이지만, 진만은 결국 죄의식의 본질을 직시하면서 주체적인 인간이 됩니다."
소설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된 작품. 6개월간의 개작 과정에서 연재 당시 원고 분량의 절반을 줄었다. "작중 인물보다는 작가 이기호의 목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았고, 종교적인 알레고리도 약화시키고 싶었다"는 것이 개작에 관한 이씨의 변. 첫 장편을 끝낸 심경을 "한두 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여러 인물을 다독거리는 것이 힘들었다. 좀 멍하다"고 토로한 이씨는 현재 계간 '세계의 문학'에 전두환 정권 시절 얼떨결에 수배자가 된 한 사내를 주인공으로 한 두번째 장편소설 <수배의 힘> 을 연재하고 있다. 수배의>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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