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를 포함해 요즘 대다수의 집에서 가족의 전체 의견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여론(女論)이다. 사방에서 자기만 잘 낫다고 아우성치는 사회에서는 나의 여론(余論)보다 너의 여론(汝論)을 잘 들어줘야 세상 살기가 편하다. 또한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별 볼일 없는 여론(餘論)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무리의 여론(與論)을 생각 없이 따르다가는 포퓰리즘이라고 욕먹는다.
선거기간 중 여론조사의 여론에 대한 올바른 한자어는 輿論(수레 여, 말할 론)이다. 수레 여(輿)자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글자의 뜻을 보면 임금이 타고 다니던 가마나 수레(輿駕), 온 세상을 의미하는 땅 또는 천지(大東輿地), 무리(衆), 많다(輿望)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따라서 여론을 글자 뜻대로 풀이해보면 '임금이나 치자(治者)가 수레 안에서 온천지를 돌아다니며 밑바닥 무리(百姓)들로부터 듣는 많은 의견'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뜻 중에서 '많은 무리의 의견'이라는 뜻만 잘못 전달돼 여론(輿論)을 단지 다수의 의견(衆論)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일본에서 여론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세상에 널려 있는 의견'이라는 뜻의 세론(世論)이 더 정확한 여론(輿論)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여론조사의 역사는 500년이 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12년(1430년) 3월 5일 호조에서 발의한 공법(貢法ㆍ새로운 토지세법)의 시행을 위해 세종은 '온 국민에게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고 여론조사를 명하였다. 8월 10일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고 가(可) 9만8,657, 불가(不可) 7만4,149로 나타나 공법의 시행을 추진하게 됐다.
여론조사는 그 결과가 언론매체에 보도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언론매체에 보도된 여론조사가 엉터리라면 그것은 차라리 보도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런데 더욱 나쁜 것은 여론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선거법에 따라 선거 6일 전부터 선거 당일 투표마감 시각까지 정당 지지도나 당선자를 예상케 하는 여론조사 경위와 결과를 공표하거나 인용해 보도할 수 없다. 최근 5곳의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에서도 막판 판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국민들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여론조사 결과의 향배에 따라 승리 가능성이 높은 후보로 지지가 쏠리는 '승자편승(bandwagon)효과'가 작용할지, 아니면 약세 후보가 유권자들의 동정을 받아 지지가 오르는 '약자동정(underdog)효과'가 있을지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양쪽 효과가 모두 있을 테니 판세에 미치는 영향은 중립적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번 여론조사 공표 금지기간 중에 매체에 나타난 선거 판세는 대부분 '박빙 승부'라던가 '추격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등과 같은 애매모호한 표현들로, 실제 판세를 알고 그렇게 쓰는지 아니면 그냥 전적으로 추측에 의한 것이지 알 방법이 없다.
결과적으로 재보선 선거의 투표율이 상당히 높은 것은 대부분 매체에서 이번 선거결과를 초박빙, 또는 승리를 아무도 점칠 수 없는 승부라고 규정지어 유권자들에게 오히려 흥미를 갖게 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론조사 결과의 공표를 금지해 나타난 기이한 긍정적 효과이다.
강남준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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