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좀 안다 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요즘 인기 있는 맥주를 꼽으라면 호가든을 빼놓을 수 없다.
2002년 처음 국내에 소개된 호가든은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띠는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여성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의 마케팅을 편 게 어느 정도 시장에서 '먹혔다'는 분석이 나온다.
맥주 업계에선 당연히 호가든 마케팅 담당자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터. 전통적으로 맥주 업계에는 남성이 많았지만 호가든 마케팅은 분명 여성이 맡고 있을 거라는 추측이 제기됐다. 그래서 직접 만나 봤다. 추측과 달리 그는 남성이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처음 만난 여성이라도 어떤 맥주를 고르는지 보면 대략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단다.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미혼 남성이라면 그의 이야기에 솔깃해질 만하다.
호가든, 트렌디한 여성
강상범(34) OB맥주 프리미엄마케팅팀 과장은 맥주 업계에 입문한 지 올해로 2년 째다. 동종 업계에서 십 수년씩 일한 사람들도 있는데 벌써 맥주로 여성 스타일을 파악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게 믿겨지질 않았다.
"회사엔 저보다 맥주에 대해 훨씬 많이 아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제가 관심 있는 건 맥주 자체보다는 맥주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문화나 트렌드죠. 맥주 브랜드의 홍보 캠페인 이벤트 같은 업무를 담당하다 보니 소비자들이 어떤 형태로 맥주를 마시는지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됐어요."
그가 맡은 브랜드는 카스 같은 2,000∼2,500원대의 일반 맥주가 아니라 5,000∼1만원대의 프리미엄 맥주다. 술을 '많이' 마시는 남성이 일반 맥주의 주요 고객층이라면 프리미엄 맥주는 술을 '골라' 마시는 여성을 타깃으로 한다.
특히 직장에 다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성이 주요 마케팅 대상. 경제력을 갖고 즐기는 문화를 추구하는 대표적인 소비자층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여성의 소비 스타일과 생활 패턴에 관심이 갔고, 이를 맥주 브랜드 마케팅과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됐다는 것.
"요즘처럼 날씨 좋은 오후에 시내 공원이나 가로수 거리를 가 보면 벤치에 앉아 맥주를 한잔씩 하는 여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요. 노천카페에서 커피나 주스 대신, 맥주를 선택하는 여성도 늘었죠. 음주 문화가 밤에 여럿이 모여 맥주로 스트레스를 푸는 한국식에서 낮에 가까운 사람과 오붓하게 음미하는 유럽식으로 바뀌고 있어요."
강 과장은 그 흐름의 중심에 바로 호가든이 있다고 말한다. 음주 문화의 변화가 바로 호가든 마케팅의 키워드라는 얘기다.
보리로 만드는 보통 맥주와 달리 호가든의 원료는 밀이다. 오렌지 껍질과 인도 요리의 단골 향신료인 코리앤더의 향도 더해졌다. 이국적이고 약간은 스파이시한 맛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 맥주의 무겁고 쓴 맛이 부담스러운 여성들이 주로 찾는다.
"호가든을 좋아하는 여성들은 다른 맥주와 차별화한 맛을 선택하는 거죠. 그래서 센스 있고 최신 트렌드에 민감한 스타일이 많아요. 색다른 맥주에 대해 상대방과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풀어 가기도 하고요. 사교성 좋고 쾌활한 '알파걸'이죠."
호가든 병의 목 부분은 다른 맥주병과 달리 볼록하게 생겼다. 밀 맥주는 생산 공장에서 1차로 발효된 다음, 병에 담기면 2차 발효가 이뤄진다.
병을 기울여 맥주를 따를 때 볼록한 병목에서 잠깐 멈추면 2차 발효 생성물이 한 번 더 잘 섞일 수 있다. 호가든 특유의 맛을 유지하기 위한 숨은 비법인 셈이다.
병 아래쪽에 거꾸로 박혀 있는 로고도 다 이유가 있다. 2차 발효 생성물이 잘 섞이게 하려고 간혹 병을 거꾸로 세워 진열해 두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깃거리들이 호가든을 선택한 여성에게 특별한 대화 소재를 제공해 준다.
벡스, 자기 관리 철저한 여성
전 세계 맥주 가운데 판매량이 가장 많은 게 버드와이저란다. 숙성 과정에서 비치우드(너도밤나무)를 넣고 3주일 동안 함께 발효시켜 낸 고유의 향과 맛으로 '맥주의 제왕'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미국의 정통 맥주 버드와이저의 애호가는 아직 대부분 남성이다.
"첫 만남에서 버드와이저를 주문하는 여성이라면 정통 맥주의 맛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분이겠죠. 그만큼 남성들이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스타일일 거에요."
여성들이 맥주를 멀리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칼로리 때문이다. 배가 나올지 모른다는 걱정 말이다. 몸매 관리에 민감한 여심을 사로잡는 데 유용한 맥주로 강 과장은 벡스를 추천한다.
보통 맥주 200㎖의 평균 열량이 75㎉인데 비해 벡스는 58㎉로 20% 정도 낮다. 군더더기 없이 미끈하게 빠진 현대적인 병 디자인도 눈길을 끈다.
강 과장은 "벡스나 벡스 다크를 선택하는 여성은 외모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자기 관리가 철저한 스타일일 확률이 높을 겁니다"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예전에 비해 외국 문화에 더 익숙해졌다. 조기 유학으로 일찍 외국 생활을 경험하기도 하고, 학교를 졸업한 뒤 커리어 관리를 위해 다시 어학 연수를 다녀오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이런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서구 문명에 관심이 많을 뿐 아니라 받아들이는 데도 거부감이 크지 않다. 마케팅 담당자의 눈으로 볼 때 외국에 많이 다녀 봤거나 서구 문명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많이 찾는 맥주는 스텔라 아르투아나 레페를 꼽을 수 있다.
"맥주를 자주 마시는 고객들 가운데도 스텔라를 모르는 분이 많을 정도로 아직 국내에선 스텔라의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아요. 스텔라를 주문하는 여성이면 '나 이런 맥주 마신다'고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스타일일 수 있죠."
자신만의 고급스러운 멋과 개성을 추구하는 '엣지' 있는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스텔라는 맥아와 옥수수 원료의 색을 그대로 살린 독특한 황금색이 돋보인다.
상쾌하면서도 전통 맥주 본연의 쌉쌀한 맛이 분명하다. 병도 남다르다. 입구부터 병목까지 살짝 감싼 흰 종이는 흡사 여성이 고급스러운 스카프나 숄을 두른 듯한 느낌을 연출한다.
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레페는 중세기 수도사들의 양조 기술을 그대로 계승한 브랜드로 유명하다. 레페 브라운은 카푸치노처럼 풍부하고 부드러운 거품이 특징이다. 레페 블론드는 정향나무의 향이 가미돼 신선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낸다.
강 과장은 "레페는 다른 프리미엄 맥주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다"며 "중세 맥주의 전통 풍미를 찾는 걸 보면 로맨틱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여성일 것"이라고 말했다.
레페 브라운과 레페 블론드의 알코올 도수는 각각 6.5%, 6.6%다. 호가든은 4.9%, 버드와이저와 벡스는 5%, 스텔라는 5.2%다.
'맥주 여성론'에 숨겨진 의미
"처음 만나는 여성에게 제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맥주를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를 물어 보곤 해요. 대답을 듣고 나면 대략 어떤 스타일이겠구나 추정할 수 있으니까요. 매번 꼭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직업상 얻게 된 이런 경험이 사회에서 대인 관계를 맺을 때 많은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해요."
강 과장의 '맥주 여성론'을 듣다 보니 그 자신은 어떤 맥주를 좋아하는지 궁금해졌다.
"운동을 참 좋아해요. 그래서 예전엔 스스로 버드와이저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죠. 이 업무를 계속하다 보니 점점 생각이 달라졌어요. 색다른 식당이나 바를 하나씩 알아가는 걸 좋아하거든요. 요리도 즐기는 편이고요. 알고 보니 '호가든스러운' 남자인 것 같네요."
맥주 업계로 진출하기 전 강 과장은 주로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소비재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했다. 스스로 그땐 트렌드에 둔한 편이었다고 말한다.
"주부는 자신보다 가족들을 더 많이 생각하잖아요. 주부용 소비재의 마케팅 담당자들이 가장 고민스러워 하는 것은 주로 어떻게 하면 가격을 낮출 수 있을지, 어떤 사은품을 준비할지였어요. 마케팅 대상이 20, 30대 여성이면 업무 방향이 확 달라지죠. 그들의 니즈를 세심하게 파악해 돈을 좀 더 들이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의 맥주 여성론에는 맥주 업계와 음주 문화의 흐름뿐 아니라 마케팅의 성공 전략까지 담겨 있는 셈이다.
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사진=김주성기자 poem@hk.co.kr
■ 프리미엄 맥주는 잔도 독특해
맥주 전문점에서 프리미엄 맥주를 주문하면 종종 전용 잔이 따라 나온다.
맥주의 고급화, 트렌드화라는 프리미엄 맥주의 취지에 걸맞게 각각의 전용 잔에도 한껏 개성이 담겨 있다. 각 맥주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 최상의 맛을 즐기려는 맥주 애호가들에게 전용 잔은 필수품이다.
전용 잔으로 일찌감치 유명세를 탄 프리미엄 맥주가 바로 레페. 유리에 그려진 수도원의 모습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한몫한다. 그러나 더욱 이목을 끄는 건 잔 전체의 모양. 성당에서 미사 때 포도주를 담는 잔인 성배의 모양을 본떴다.
스텔라 아르투아 전용 잔은 입술이 닿는 윗부분 가장자리가 금테로 장식돼 있다. 고급 맥주를 지향하는 브랜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전체 모양도 와인 잔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금테 장식을 가릴 듯 말 듯 거품이 약간 넘치게 맥주를 따른 다음, 거품 윗부분을 전용 커터로 제거해 서비스하는 매장도 있다.
아래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육각형 모양의 잔은 호가든 전용이다. 두껍기 때문에 쉽게 따뜻해지지 않고, 굴곡이 있어 거품을 풍부하게 한다. 입구가 넓어 호가든에 가미된 향신료의 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겉면을 만져 보면 맥주가 3분의 2 정도 차는 높이에 홈이 파여 있다. 바로 여기에 호가든을 가장 맛있게 마시는 비법이 담겨 있다. 먼저 병에 들어 있는 호가든 맥주를 홈 높이까지 따른다. 나머지는 병째로 가볍게 흔들어 거품을 내 2차 발효 생성물이 잘 섞이도록 한 다음, 홈 윗부분에 살짝 얹어 내면 된다.
강상범 과장은 "독특한 음용 방법 때문에 호가든 전용 잔을 구매할 수 없느냐는 고객들의 문의도 많이 들어온다"고 귀띔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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