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외우기도 쉽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오줌 누러 왔는지, 똥 누러 왔는지'를 잊어버려 바지춤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극 중 장면이 그들의 실제 모습이라고 했다.
춤을 추려면 몸이 따르지 않았다. 무릎이 좋지 않아 연습 도중 틈만 나면 바닥에 퍼져 앉아 "아이고 되라~(고되다)"를 내뱉기 일쑤였다. 새파란 젊은 연출가에게 꾸지람을 듣다 보니, 어떤 배우는 '원형 탈모증'까지 생겼다. "이 나이에 내가 여기서 뭐하나" 싶어 그만 두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4개월간 동고동락하며 갖가지 고비를 넘긴 염덕해(78·여) 이윤영(77) 정상기(68) 권영국(68) 김천혜자(66·여) 하승자(65·여)씨. 유치원 원장, 경찰관, 공무원, 주부 등 지나온 삶은 다르지만, 이들은 무대를 향한 열정 하나로 뭉쳤다. 지난 7월 국내 첫 실버 뮤지컬단으로 창단한 서울중구실버뮤지컬단 단원들이다.
지난 3일 오후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반짝이 재킷에 중절모를 쓰고선 뮤지컬 연습에 여념이 없는 이들은 긴장과 흥분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뮤지컬단의 첫 무대인 창작 뮤지컬 'Long Long Stream(오래된 시냇가)' 공연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객원배우로 참여한 5명의 전문배우들과 함께 막바지 연습을 하고 있었지만, 어르신들의 연기와춤은 여전히 아슬아슬했다. 모두들 비스듬히 옆으로 섰는데, 정상기씨 혼자 정면을 보고 선 채 중절모도 엉뚱한 순서에 들어올리는 등 이래저래 실수 연발이었다. 배우들 동선이 자꾸 어긋나 오프닝의 안무 연습만 다섯 차례. "옆 사람 구두소리를 들으면서 박자를 맞추세요!" 연출자 임경주(28)씨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오래된 시냇가'는 해체 위기에 몰린 극단 '냇물'의 선임 배우들이 후배들과의 세대 갈등을 풀고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작품을 선보인다는 내용이다. 엔딩 무대에서 배우들은 모두 어우러져 노래를 부른다. "춤추고 노래할 때 나는 행복해. 내 안의 모든 괴로움이 사라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
늦깎이 배우들의 마음도 노래 가사를 꼭 닮았다. 30여년 공무원 생활을 한 정씨는 "은퇴한 뒤 우울증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2007년부터 뮤지컬을 배우면서 잡념이 없어지고 건강도 좋아지고 영혼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자리를 준대도 이젠 별로 안 땡긴다. 대통령보다 뮤지컬이 더 좋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형사반장 출신인 이윤영씨는 "고등학교 때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Sing in the rain)'를 보고 동경했던 뮤지컬 배우의 꿈을 이제야 이루게 됐다"고 말했다.
뮤지컬 창단 뒤 하루 4시간씩 일주일에 사흘을 연습했고, 대본이 확정된 지난달부터는 하루 6시간씩 일주일에 엿새를 연습하는 강행군이었다. 40여년간 유치원을 운영했던 최고령자 염덕해씨는 "감기몸살에 걸려도 죽을 먹어가며 연습했고, 원형탈모까지 생겨 고민도 많았다"며 "하지만 오디션에서 나를 뽑아준 만큼 실망시켜드리면 안되겠다 싶어 더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김숙희(56) 단장은 "각양각색의 삶을 산 여섯 분이 호흡을 맞추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며 "다들 한번씩은 고비가 있었다"고 말했다. 염씨는 극중 내용이 마치 실제 상황이라도 된 듯 악역을 맡은 객원배우에게 "왜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행동하냐"고 다그치는가 하면, 권영국 정상기씨는 단장의 야단에 자존심이 상해 전화기를 꺼버리고 나오지 않은 때도 있었다. 객원배우 박경은(38)씨는 "선생님들이 힘들어 하실 때는 '이럴 줄 알았으면 안했다'고 하시다가도, 지금은 '뮤지컬 끝나면 허전해서 어쩌냐'며 벌써부터 눈물을 지을 정도로 강한 애착을 보인다" 말했다.
늦깎이 배우들이라고 이들의 공연 수준을 낮잡아 보면 오산이다. 배우들 대부분 은퇴 뒤 3~4년 이상 구청이 진행하는 연극교실 등에서 실력을 쌓아왔고, 실제 실버뮤지컬 공연에 참여한 이도 있다. 객원배우 송진근(28)씨는 "어르신들 모두 노래는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고, 연기도 수준급이다"고 말했다. 중구청 관계자는 "단순히 여가성 노인 복지사업으로 뮤지컬단을 창단한 것은 아니다"며 "실버 세대의 경험을 살린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9시께야 3시간에 걸친 연습이 끝나자, 다들 "아이고 힘들어라"라며 신음을 토해냈다. 막내 단원 하승자씨는 "신인이니까 다 이러면서 크는 거겠죠"라면서도 "기회만 되면 프로 무대로 진출해야죠"라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공연은 5,6일 오후 7시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티켓은 무료. 사전예약 (02)2253-0111
박민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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