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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경제 '회복'이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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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경제 '회복'이 두렵습니다

입력
2009.11.0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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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컴퓨터를 잘 모르는 사람을 '컴맹'이라 하던데 경제를 모르는 사람을 '경맹'이라 한다면 저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경맹'입니다.

저는 만사에 어리고 모자랍니다. 제 사람됨이 그리 용렬(庸劣)한 탓입니다. 그러니 모르는 것이 경제만은 아닙니다. 정치도, 과학도, 예술도 모릅니다. 그런데 참 다행입니다. 제각기 그 분야에 전문가들이 계시니 그 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고 애써 헤아리면 아무리 '맹'이라 해도 그나마 더듬거리며 살 수는 있을 거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경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제 삶의 일상을 마구 옥죄는 현실입니다. 한 마디로 돈의 여유가 좀 있으면 숨을 쉬겠는데 그렇지 않으면 글자 그대로 속수무책감을 느낍니다.

그처럼 피부로 매일 느끼는 현실이라면 경제가 무언지 잘 배우고 익히며 살면 좋을 텐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경제는 가까이 갈수록 사뭇 더 복잡하고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해 보아도 마찬가집니다. '기막힌 사람이 다 있군!'하시겠지만 제가 겪은 당혹스러움의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여러 모로 편리하다는 권유를 받아 카드를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참 편합니다. 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런데 그 카드의 사용빈도와 액수가 높지 않다 하여 제 신용등급이 낮아졌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 순간 화가 났습니다. '나는 돈을 아낀 것밖에 없는데 그렇게 살면 신용 불량자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만고에 이런 법이 있나 하는 것이 제 반응이었습니다.

그 제도의 이른바 '이념'과 실제적인 '기능'과 당해 주체들의 '이익'을 잘 모르기 때문인데, 아직도 저는 그 판단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우리 신용카드를 잘 이용하지 않는군요. 그럼 아예 신용카드를 없애면 어떻습니까. 실은 그것이 고객의 편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장사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용을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이문이 남지 않거든요. 그러니 좀 고려를 해주시죠."한다면 저도 '신용등급의 고저'가 함축한 기술적(技術的)인 개념에 너그러울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 바보 같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주식시장'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고상'하고 '전문'적인 많은 어휘와 정연한 논리로 그 당위성을 말씀들 하시지만 제게는 그것이 결국 우연에 맡겨 일확천금을 꿈꾸는 투전판과 구조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거기에 투자하는 일도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할 때의 '일'의 범주에 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노동을 하지 않고 얻는 이득이란 근원적으로 부정(不淨)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경문화를 거쳐 이미 거의 사라졌다는 산업사회의 가장자리에 겨우 붙어 있는 사람이니 지금 여기의 삶의 구조를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인 것을 저도 잘 압니다만 아무튼 이것이 제 의식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금융산업에 위기가 닥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이 다 휘청거리는 듯 했습니다. 아직도 그 요동에서 인류는 온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파장이 몰고 온 여러 모습의 어려움이 개개인의 삶을 해일처럼 쓸어버리는 사태가 여기저기서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불길한, 그리고 현실적인 재앙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태 속에서 들키면 몰매 맞을 묘한 쾌재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투전판은 언제나 결국 자기 스스로 그 판을 뒤엎으면서 끝납니다. 그것이 투전판의 생리입니다. 투전판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고, 세상살이가 투전판에 의해 지탱되는 것도 아닙니다. 없는 현상은 아니지만 있어서는 아니 될 현상이 곧 투전판입니다. 그런데 금융위기란 곧 투전판이 자멸하는 바로 그 판의 종말이라고 인식되면서 마치 왜곡된 현상이 바야흐로 바로잡힐 것 같은 희망이 솟구쳤습니다.

이제 이렇게 투전판이 망하고 나면, 그래서 그 판이 사라지면, 돈 놓고 돈 먹는 돈 많은 사람들의 잔치도 없어질 것이고, 그 부자가 부러워 흉내를 내다 팔자 망치는 빈자의 환상도 깨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주의의 소멸 앞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를 확인한 양 들떴던 우스꽝스러운 자기도취도 이제 철저하게 깨지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더불어 좌도 우도 아닌 새로운 가치와 제도들이 움틀 거라는 기대도 했습니다. 차마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가슴이 뛰었습니다. 많은 현명하고 적극적인 사람들이 틀림없이 '새 질서와 새 틀'을 만들어 낼 거고, 사람들은 '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다듬었던 음식기원신화의 내용도 새삼 상기되었습니다. 여러 문화권에 널려 있는 음식신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사실이 발견됩니다. 먹이는 모두 생명의 주검이라는 것. 그러니 살기 위해 죽여야 하고,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 동물인 인간의 역설적인 삶의 실상이라는 것. 그런데 인간은 오직 살기 위한 죽임만을 추구할 뿐 살리기 위한 죽음은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아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 그리고 욕심 낸 먹이는 반드시 썩어 결국 버린다는 것. 먹이의 버림은 그러므로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죽이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먹이는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늘 더불어 잔치하듯 먹어야 한다는 것.

투전판이 깨지면 이러한 신화가 새로운 오늘의 언어로 음송되고, 그러면 사람살이가 더 낫게 '달라'지리라는 기대에 들뜨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 편, 그나마 투전판이 깨지면 벌어질 소름 끼치는 두려움이 예상되어 몇 번이고 제 황당한 비현실적인 꿈을 지우려고 마구 고개를 흔들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굶주린 인파가 광장과 거리를 메우면서 하늘과 사람들을 향해 절규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고, 분노와 절망과 자학과 체념이 인간의 마지막 존엄마저 삼켜버리는 참상이 손에 닿을 듯 그려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경맹'의 주제에 당치 않은 꿈을 꾸는 저 자신의 무책임한 환상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무모한 생각을 지우고 아무 말 없이 '잘 살아야겠다'고 저 자신을 다독거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그 조짐이 보인다고들 합니다. 경제전문가들의 이야기니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덜커덕 겁이 납니다. 그러면 잘 살게 될 희망에 즐거워야 할 텐데 왜 이리 두려운지 모르겠습니다. '회복'이라는 말이 어쩐지 투전판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될 거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회복'이 아니라 '바뀜'은 끝내 아직 먼 이야기인지요. '경맹'의 넋두리를 그저 웃어 주시기 바랍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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