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국민투표'란 말이 정치권에 등장했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이 세종시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쳐 보자고 제안한 것. 일반국민들이야 세상이 마땅치 않으면 별 생각 없이도 내뱉지만, 정치권이 언급한 건 아마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10월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한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앞서 1987년 12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후보도 유세에서 "서울올림픽 뒤 국민투표로 재신임을 묻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는 신임투표가 국민투표 대상이 아니라는 헌법재판소의 해석으로, 노태우 대통령의 약속은 집권 후 야당과의 물밑협상을 통해 각각 백지화됐다.
▦국민투표(Referendum)는 알다시피 대의민주주의의 보완적 제도로, 우리도 총 6차례 경험을 갖고 있다. 1962년 제3공화국 헌법 개정을 위해 첫 실시한 이래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에만 4번 치러졌다. 69년 3선 개헌, 72년 유신헌법 확정, 철권통치에 대한 반발을 잠재우려 유신헌법의 존속 여부를 물은 75년 국민투표 등이다. 이후 80년 5공 헌법 확정, 87년 6공 출범 전 대통령직선제 개헌 때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특히 5공 신군부정권의 출범에 즈음해 치러진 80년 국민투표는 각 95.9%, 91.6%로 역대 최고의 투표율과 찬성률을 보였다. 북한 식 선거를 방불케 하는 코미디 같은 수치다.
▦국민투표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이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외교ㆍ국방ㆍ통일ㆍ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국민투표에 대한 이미지는 썩 좋은 편이 아니다.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기보다는 자주 집권세력의 정당성을 억지로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 경험 때문이다. 실제로 72년 국민투표는 계엄 하에서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행위 등을 금지한 살벌한 상황에서 실시됐고, 74년 유신정권 신임투표와 역시 신군부 세력에 대한 신임투표 성격을 지닌 80년 국민투표도 비슷한 공포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물론 국민통제가 애당초 불가능한 지금을 당시와 비교할 건 아니다. 집권자 입장에서도 투표결과가 유리하게 나올지 장담키 어렵다. 당장 세종시 건이 국민투표'감'이 되는지부터 분명치 않다. 딱히 국가안위에 관한 문제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두려운 건 국민투표가 나라 전체를 또다시 갈라 온통 싸움판으로 만드는 상황이다. 가뜩이나 갈등이 심각한 우리사회에서 국민투표는 자칫 정권의 기반을 흔드는 폭발적 국면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정치인들, 더욱이 집권 측에서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걸 보면 아슬아슬하다. 도대체 순진한 건지, 무책임한 건지….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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