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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정운찬, 순수와 무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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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정운찬, 순수와 무지 사이

입력
2009.11.03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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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정운찬 총리 하면, 자유 지성 온정 독립성 등이 떠올랐다. 인사동의 한 선술집에서 언론인 문인 등과 어울려 세상사를 논하던 모습은 멋스럽기까지 했다. 옳지 않은 일에 옳지 않다고 말하고, 힘 없는 자들의 편에 서는듯한 그에게서 향취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총리가 된 이후 그에게 왠지 그런 멋과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개인적인 인상 비평이지만 그의 제자들이나 지인들 중에서도 그런 평을 내놓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초라해 보인다고 걱정하는 이도 있다.

무엇 때문일까.

총리를 맡는 순간 본인이 거부하고 싶어도 정파적 색깔이 칠해지고, 그것이 국민 절반에 가까운 다른 정치적 성향의 사람들을 잠재적, 심정적 반대자로 돌리게 하는 한국 정치의 숙명 때문일까. 평소 정 총리의 말이나 글에서 나타나는 가치와 그의 선택이 달라서일까. 아니면 청문회에서 드러난 흠결 때문일까.

그러나 그것 때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그의 이름 석자가 쌓은 내공이 그리 간단치 않다. 총리직을 맡았을 때 당황했던 사람들도 "다 생각이 있지 않겠느냐"며 기대를 접지 않았다. 지금도 그 기대가 사라진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럼에도 그를 향한 걱정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를 좋아했던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그것은 정 총리가 취임 몇 달도 안돼 꺼내든 '세종시 수정과 4대강 사업 추진의 선봉'이라는 승부수 때문이다.

사실 정 총리가 이 두 사안에 곧바로 올인하지 않는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워낙 중요하기에 충분히 알아보고, 들어보고, 생각해보고 그리고 그 이후에 움직여도 다들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일찍 칼을 빼 들었다.

옳고 그름의 차원은 일단 차치하고, 정치적으로만 보면 그는 불리한 지형의 전장을 택해 단판승부를 걸고 있는 형국이다.

우선 외견상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그가 학자 시절 비판했던 4대강 사업에 앞장서면서, 국민과의 약속인 세종시 문제는 뒤집으려 하고 있다. 더욱이 4대강 사업에서는 환경 우려, 불요불급함, 절차상 하자 등 많은 비판를 배척하면서, 세종시 문제에서는 국정의 비효율성, 수도권 경쟁력 약화 등의 지적을 받아들여 수정에 나서고 있다. 지극히 편의적이다.

특히 세종시 수정은 국토균형 발전이라는 헌법상 가치와 정치신뢰라는 중요한 덕목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세종시 문제의 경우 행정부가 나눠져 발생하는 비효율성, 소모성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반대로 그 정도는 해당 부처와 관련자들의 불편함일 뿐이며 약속 불이행으로 야기될 불신, 균형발전 포기, 수도권 과밀의 비효율성 심화 등을 지적하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이 공공기관 지방이전 등 균형발전 정책을 끊임없이 추진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정 총리가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이런 문제들을 충분히 숙고하고 '악역'을 맡았는지 의문스럽다.

현실적으로 야당과 충청, 그에 더해 한나라당 내 친박계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세종시 수정을 실현해 내기는 쉽지 않다. 만약 그대로 추진된다면 평지풍파를 일으킨 책임이 다 쏟아질 것이고, 설령 수정을 이뤄낸다해도 상처와 후유증이 엄청날 것이다.

정 총리가 이런 부담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묘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 그런 준비를 하고 있는지 걱정스럽다. 만약 준비 없이 나섰다면 그는 너무 순수하거나 무지한 것이다.

이영성 부국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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