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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18> 박사학위 받고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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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18> 박사학위 받고 귀국

입력
2009.11.03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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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는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있고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공부가 있다. 나는 미국 유학 중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를 했다. 나는 평생 이 때만큼 공부에 몰입해 본 일이 없었다. 길을 걸을 때에도 화장실에 있을 때에도 머릿속에서 어떤 문제의 풀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하루하루 새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새로 얻은 지식가운데 기발한 아이디어와 착상은 그 요점과 출처를 카드로 정리하여 이것을 박사학위 논문에 유효하게 활용하였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다섯 아이들을 서울에 두고 있다는 것도 내게는 하나의 채찍이었다. 밤 자정이 되어 공부를 마칠 때면 가족을 생각하고 맥주를 마시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학업에 대한 결의를 굳게 다짐하곤 했다.

석 달 이상이나 되는 긴 여름 방학이 오면 기숙사는 문을 닫고 학생들은 공부를 잠시 잊고 아르바이트 일터로, 고향으로, 여행지로 뿔뿔이 흩어진다. 나는 이 기간을 학업을 따라잡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인근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공부에 전념했는데 이렇게 여름방학을 보내고 나서 나는 학업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강의에 대한 이해력도 높아지고 학업성적도 좋게 나왔다. 그래서 가을학기가 지날 무렵 석사학위 필기시험과 석사학위 논문을 모두 마쳐 1년 만에 석사학위를 마쳤다.

그리고 한 해 뒤에는 박사 학위 필기시험을 마치고 다음 해인 1974년 2월에는 학위논문이 통과되어 사실상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마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석 달 뒤인 5월 졸업식에서 학위증을 받고 바로 귀국하였다.

보통 4~5년 이상 걸리는 박사학위를 어떻게 2년 동안에 끝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 왔다. 우선 이러한 공부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이것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야 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해서는 깊이 있고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다만 그 당시 나와 같은 특수 환경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인데 학위 취득에 필요한 소요시간은 주로 학위논문과 연관되어 있다. 나는 69년 <한국경제 성장론> 을 쓸 때부터 노동력은 남고 자본은 부족한 한국형 모형에 관심이 많아 이 문제를 주제로 하여 학위논문을 쓰기로 하고 미리부터 철저히 준비를 했던 것이며 이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라 할 것이다.

논문 제목은 '노동력과잉 경제에 있어서 외자의 개발효과'인데 외자의 경제개발효과는 자원(또는 자본)이 많은 나라보다 노동력이 많은 나라에서 더 크다는 것이 이 논문의 결론이다.

내가 미국에서 경제발전 분야를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어릴 때의 꿈이 성취된 의미가 있었으며 그만큼 그 후 나의 사회적 성장에 큰 변수로 작용하였다. 그 뿐 아니라, 2년여의 미국 유학은 나에게 경제적으로도 적지 않은 혜택을 주었다.

나는 첫 학기부터 장학금을 받고 다녔기 때문에 한국은행에서 보내준 돈은 그 상당부분을 저축할 수 있었고 그 때 아내는 전화도 놓고 냉장고도 마련했던 것이다.

그 뒤 내가 한은 총재로 재직하던 2004년 6월에 모교인 뉴욕주립대학 동문회는 나에게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수여한다고 알려 왔다. 마침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에서 강연초청도 있어서 졸업한지 꼭 30년 만에 동문상 수상을 위해 모교를 찾았다.

그리고 내가 한은 총재직을 그만 둔 다음 해인 2007년에는 뉴욕 주립대학의 5월 졸업식에서 내게 인문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는 연락이 와서 우리 내외와 자녀들이 함께 갔다. 33년 전 내가 박사학위를 받던 바로 그 자리에서였다.

마침 여름 방학 중인데도 경제학과 교수 십여 분이 나를 위해 다과를 베풀어 주었다. 그 중에는 내가 직접 배운 인도인 우팔 교수와 한국인 이봉석 교수가 있어 특히 감회가 깊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다시는 이곳에 못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와 기숙사 그리고 그 때 다니던 선술집 등을 아내와 함께 구석구석 찾아보았다.

74년 5월 귀국하여 조사부 특수연구실 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이 때는 73년의 오일쇼크로 온 세계경제가 큰 위기에 당면한 때였다. 72년까지 배럴당 2달러 하던 원유 값이 73~74년을 지나면서 5달러, 8달러로 급등하여 이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와 인플레의 동시현상)으로 그 대책 마련에 온 세계가 부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한국은 그 심각성을 아직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유가 폭등으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은 처음 당하는 것이어서 평상시의 경기침체나 인플레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74년 9월에 '경기대책이 왜 공전 하는가'라는 제목으?약 40매의 원고를 써서 무작정 중앙일보사에 우송했던 바 뜻밖에도 그 전문이 1면에 두 번으로 나뉘어 크게 게재 되었다.

그 주 내용은 유가상승으로 인한 인플레는 외부에서 오는 원가상승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화긴축으로 해결 될 수 없으며 내핍과 응분의 실업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으로 지금은 상식이 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 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론이었다.

그 당시 홍성유 주필이 이 글을 보고 무명의 필자지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는 내용이라고 해서 1면에 싣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글이 나간 이후 내게는 많은 신문과 잡지사에서 원고 요청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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