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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19> 교도소가 천국이라면 정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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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19> 교도소가 천국이라면 정상일까

입력
2009.11.01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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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그토록 열망했던 박정희 정권 퇴진의 끔은 일진광풍으로 끝나고 민주세력은 몽땅 교도소나 군대로 쫓겨나고 말았다. 위수령도 학원질서 특명도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음모일 뿐 그 어떤 정당성도 갖지 못했거니와 특히 군대의 대학 투입은 노골적인 폭력통치였는데도 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박정권을 퇴진시키기 위한 투쟁을 1년 내내 치열하게 전개했는데도 왜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을까? 특히 나의 경우 수업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박정희 정권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에 전념했는데도 구속으로 끝내고 나니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당시에는 사회변혁의 주체세력이 형성돼 있지 못한 것과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의 조직화가 이뤄지지 못한 때문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 이전에 국민들이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바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이 여러 가지로 잘못하는 점은 있지만 한번만 더 하고 물러나겠다고 하는 데다 박 정권을 대체할 만한 정치세력이 없어 보였던 거였다. 그 당시 김대중씨가 대안일 수 있었으나 김대중씨는 4ㆍ27 대통령선거 후 신민당의 내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박정권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제1야당 신민당은 사이비 야당의 모습 그대로였고.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야당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야당은 사회변혁의 목표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김대중씨가 대통령후보였을 때만 달랐던 것이다. 김대중 후보를 통해 박정희정권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아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수배를 받아 피신했다. 고등학교 동창생의 소개로 그의 누님 집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었는데, 그곳을 알아낸 것은 참으로 신기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동창생이라 안전할 줄 알았는데,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마산공고 동창생 전부에게 찾아가 마치 자기들이 나를 숨겨주고 있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처럼 행세하면서 내가 자수토록 하거나 나를 넘겨주면 선처하겠다고 말해서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낸 거였다.

나는 안양에서 체포돼 곧바로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조사실에 들어서자마자 담당자가 "혁명위원회를 구성할 때 누구누구로 구성하려 했느냐"고 물었다. 혁명위윈회를 구성한 일이 없다고 말했더니, "이거 신사적으로 하려 했더니 안 되겠구먼"하면서 군복으로 옷을 갈아입게 했다.

처음에는 침대 방망이 같은 것으로 때리더니 곧바로 마대부대 같은 것으로 온몸을 덮어씌워 놓고서 구둣발로 마구 짓밟는 등 온갖 고문을 다 했다. 그들은 기술적으로 고문을 하겠지만 나로서는 병신이 되는 줄 알았다.

그들은 항상 고문을 하다 죽으면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가는 것을 사살했다고 하면 된다"고 말했다. 혁명위원회를 구성했기로서니 말할 수 없는 터에 그런 일이 없으니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김대중씨를 혁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추대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신범이나 조영래, 심재권보다 늦게 체포돼 이들에 대한 조사가 거의 마무리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게 되어 "다른 사람들이 다들 이렇게 진술했으니 그대로 진술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물론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지만 이 경우에는 사실인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고문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진술한 것임을 빤히 알면서 그대로 진술할 수는 없었다. 계속 부인했더니 조영래한테서 쪽지가 왔다. 다들 그렇게 진술하기로 했으니 나도 그렇게 진술하기를 바란다는 거였다. 조영래 생각으로 나의 순진성으로 보아 내가 계속 부인하다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할까 봐 걱정된 것 같았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신범, 심재권, 조영래 등과 함께 '서울시내 대학생 3만명 내지 5만명을 동원해 화염병을 사용해서 중앙청을 점거하고 박정희를 강제로 하야시킨 후 혁명위원회를 만들어 김대중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피고인들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인사들과 함께 위원으로 취임,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3권을 장악하여 헌법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부패분자를 처단하고 중앙정보부를 해체하는 등의 혁명과업을 수행하려 했다'는 내용으로 구속·기소되었다.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이었다.

물론 이 내용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에 근거한 거였지만, 그러나 이 사건이 조작됐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관계에서 조작된 게 있고 또 우리의 투쟁은 민주화를 위한 정당한 투쟁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을 물리치려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 자체를 조작이라고 주장해버리면 자칫 우리가 영구집권으로 치닫던 박정희 정권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을 하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는? 이것은 사실도 아니거니와 또 부끄러운 일이 되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히 박정권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박 정권으로서는 물러나지 않기 위해 민주세력을 제압했던 것이다. 민주세력과 독재세력의 한판 대결에서 민주세력이 패배했을 뿐이다.

밤늦게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는데, 덜커덩거리는 철문을 몇 개나 지나쳐 어디론가 깊숙이 들어가는 것 같아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방안으로 들어서자 '이제야 살았구나' 싶었다. 그야말로 교도소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었다. 수사기관에 오래 있다 보면 거기서 벗어나는 게 최대의 기쁨이었다.

교도소는 나에게 그런 측면에서만 천국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천국 같았다. 자유의 구속에서 오는 고통과 불편함이 없진 않았지만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 의식주가 내 적성에 꼭 맞았다.

나는 징역을 살면서 교도관들로부터 "장기표씨는 교도소가 그렇게나 좋으냐"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좋지 않은들 달리 무슨 수가 없는 데다 교도소 생활이 나에게 맞기도 해 교도소를 내 집처럼 생각하고 살았다. 교도소를 천국으로 생각하는 게 꼭 옳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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