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지난달 31일 오전 11시45분 별세했다. 향년 85세. 이 전 부장은 지난 5월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에 입원했지만 뇌종양과 노환 등으로 병세가 악화돼 이날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이 전 부장의 인생은 '권력무상' 그 자체였다. 그는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권력자였으나 유신체제 붕괴 이후 29년 동안 칩거 생활을 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1924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공립농고를 나온 뒤 1945년 12월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 육군 정보국 차장 등을 지냈다.
그는 61년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공보실장을 맡으면서부터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63년 박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일약 권력의 핵심 실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69년 10월 3선 개헌의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 전 부장을 주일본 대사로 보냈고,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해임됐다. 그렇지만 이 전 부장은 70년 12월 제6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권부 핵심으로 복귀했다. 이어 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하며 명실상부한 2인자로 발돋움했다.
그는 72년 5월 대북밀사로 평양에 파견돼 김일성 북한 주석과 남북비밀회담을 가졌고 7ㆍ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그는 3박4일 동안 평양에 머무르면서 두 차례에 걸쳐 김 주석과 회담했다. 그 뒤 그는 72년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하는데 앞장서고,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전 부장은 그러나 7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라는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의 발언 파문으로 해임됐다. '오뚝이'란 별명을 가진 이 전 부장은 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고향인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권력'으로 세상을 호령했지만 말년에는 불우했다. 79년 10ㆍ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신군부에 의한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몰리면서 그는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났지만 정계를 떠나 경기 하남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최근까지 은둔 생활을 했다. 99년에는 그가 소유한 경기 하남시 자택과 땅은 보험회사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경매로 넘어갔다. 2004년에는 부인이 당뇨 등 지병으로 별세했다.
그는 이후 노인성 질환을 앓기 시작한 뒤 최근 거동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다. 유족은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 등 3남 1녀. 빈소는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지는 대전 국립현충원, 발인은 2일 오전 8시30분. (02)440-8922
고성호 기자
■ "이후락 자녀들 최대 5000만弗 美 부동산 소유"
31일 사망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자녀들이 미국에 최대 5,000만달러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재미교포 블로거 안치용씨는 이날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사이트 '시크릿 오브 코리아(http://andocu.tistory.com)'를 통해 "자녀들이 한국의 재벌 일가가 사는 뉴저지주 알파인에 호화주택을 소유한 것은 물론이고 뉴욕 맨해튼의 대형빌딩, 퀸즈의 빌딩, 최근에는 뉴저지주 엣지워터의 대지와 주택을 구입하는 등 부동산 규모가 3,000만~5,000만달러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전 부장이 애초 3남만을 슬하에 둔 것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외동딸도 있다고 밝힌 뒤 "현재 뉴저지 알파인에 사는 외동딸 A씨 부부는 3년 전에 시세가 600만달러가 넘는 집을 구입하는 등 1975년부터 수 차례에 걸쳐 뉴저지주, 하와이, 뉴욕 등지에서 주택과 건물을 사고 팔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 전 부장의 큰아들과 작은아들도 미국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며 "계약서 스캔 등이 끝나는 대로 그 내역을 차근차근 밝히겠다"고 덧붙였다.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안씨는 최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한국 정ㆍ재계 인사 및 연예인들의 '미국 내 부동산 쇼핑 실태'를 공개해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태무 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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