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 등 지음ㆍ장정일, 김경주 엮음 이매진 발행ㆍ427쪽ㆍ1만2,000원
만일 세계문학사의 지도에 셰익스피어, 괴테, 베케트, 브레히트가 그려지지 않았다면 어떨까?
암흑은 아니겠지만, 문학사는 지금보다 훨씬 초라하고 쓸쓸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최근까지도 노벨문학상이 극작가(2005년 해럴드 핀터)에게 돌아간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문학에서 희곡, 극작가의 위상은 간단치 않다.
반면 한국문학의 상황은 어떨까? 매년 신춘문예나 공모를 통해 상당한 수의 희곡작가가 등단하지만, 이들이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할 공간은 드물고 운좋게 희곡집을 출간한다고 해도 문예지 등의 서평 대상으로 오르내리는 일은 전무하다. 한국문학에서 희곡은 '문학적 서자'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문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소설가들, 신예 시인들이 함께 엮은 희곡집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는 하나의 '사건'이다. 숭어>
시ㆍ희곡ㆍ소설의 장르를 넘나드는 장정일(47)씨가 총지휘를 맡고 소설가 하일지(54), 정영문(44), 서준환(39)씨와 시인 김경주(33)씨가 의기투합해 내놓은 성과물이다.
4편의 수록작 중 2002년 국립극장 창작공모에 당선돼 무대에 올랐던 정영문씨의 '당나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작. 이 의미심장한 장르 월경은 참여 작가들의 개성만큼이나 독특하고 유쾌하다.
하일지씨의 '파도를 타고'는 한국땅을 떠나 일엽편주로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한 가족의 표류기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억지스러운 행동과 "한국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종교를 믿고 있지요. 한국이라는 종교 말이에요" "한국에서 살아 배기려고 하는 것부터 수치" 같은 뼈있는 대사를 통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국가주의를 비판한다.
정영문씨의 '당나귀'는 적군이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왕이 도주해버린 가상의 왕국에서 장군, 신하, 학자, 광대, 백정이 '싸울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벌이는 말다툼이 소재다.
정씨의 소설에서처럼 인물들은 의미없는 대사를 반복하는데, "장군은 이 연극 속에서 가장 얼이 빠져있는 사람이다" 같은 대목에서는 리더십을 상실한 한국정치에 대한 풍자도 읽힌다.
서준환씨의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는 한 섹스숍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몽환적인 기법으로 다루고 있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남성과 여성의 엇갈리는 시선을 통해 서씨는 '다층적인 텍스트 읽기'라는 실험을 시도한다.
김경주씨의 '블랙박스'는 비행기 기내라는 극소화된 무대를 배경으로 추락이라는 상황에 직면한 두 남녀의 불안한 심리를 그린 희곡이다.
'물방울, 푸르고 비린 냄새, 교미중인 구름' 같은 이미지들이 산재해 있는데, 작가는 언어에 의한 구원 가능성, 인간의 실존적 공포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장정일씨는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라는 제목으로 쓴 프롤로그에서 "문학과 연극의 길트기라는 원대한 계획 이전에, 좀더 소박한 희망… 바로 한국 문단에 존재하고 있는 장르간 칸막이 현상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보겠다는 욕심"에서 출발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이 유쾌한 '작당'에 다른 작가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시인 황지우 김정환, 소설가 김연수씨 등이 다음 희곡집에 참여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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