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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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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시간들

입력
2009.11.01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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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일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밤, 창문을 열고 집 앞 골목을 바라봤더니 1초에 하나씩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었어요. 내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면 나는 나뭇잎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지 못했겠죠. 만약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그 희미한 소리, 하지만 마치 온 세상이 떨어져 내리는 듯 내 마음을 장중하게 울리던 그 소리를 듣지 못했겠죠.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나무의 잎들이 모두 떨어져 내렸어요. 그 잎들은 모두 나무의 발치에 있다는 걸 알겠는데, 그 소리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건 또 그렇다 치고, 사십 년 정도 살고 난 뒤에야 저는 이 침묵이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생긴 침묵이라는 걸 알았네요. 그동안 그냥 조용하다고만 생각했던 거예요. 어쩐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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