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 가면서 곳곳에서 쌉싸래한 국화 향기를 맡는다. 꽃 향기에도 맛이 있어서, 장미가 은은한 단내를 풍긴다면 코끝에 오래 머무는 국화 향기에는 연한 쓴맛이 얹혔다. 같은 힘으로 내뱉으면 낮은 소리가 더 멀리까지 들리듯, 차분히 가라앉은 국화 향기도 멀리 간다. '향기를 듣는다'(聞香ㆍ문향)던 옛 사람들의 멋스러운 말이 어울릴 만한 꽃이 난초 다음으로 국화일 듯하다. 난초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지만, 멀찌감치 마당 끝 꽃밭이나 울타리 옆에서 피는 국화 향기는 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한 차분한 마음결에나 파고 든다.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북송의 사상가 주돈이(염계)는 <애연설(愛蓮說)> 에서 '진나라 도연명이 홀로 국화를 사랑했다(晉陶淵明獨愛菊)'며 '국화는 꽃 가운데 은자라고 할 것이다(予謂菊花之隱逸者也)'라고 썼다. 도연명은 시 <음주(飮酒) 7> 의 앞머리를 국화 사랑으로 채웠다.'가을 국화가 빛깔도 고와라/ 이슬에 젖으며 꽃을 따네/ 술에 띄워 마시다 보니/ 세상에 남긴 정이 멀어지네(秋菊有佳色 浥露掇其英 汎此忘憂物 遠我遺世情)'국화가 지금도 지조와 단아한 품격을 갖춘 옛 선비를 떠올리는 꽃으로 기억되는 것도 반은 그의 덕분이다. 음주(飮酒)> 애연설(愛蓮說)>
■국화의 인기는 지금도 시들지 않는다. 농림수산식품부의 통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생산되는 꽃 가운데 국화는 재배 면적과 판매량에서 늘 장미와 선두 다툼을 한다. 장미와 비슷하게 연간 4억 송이 이상이 소비되는데 장미처럼 수출량이 많지 않으니 국내에서는 가장 많이 팔리는 꽃인 셈이다. 다만 대량 재배와 소비가 옛 선비들의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세월 따라 꽃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하늘색이나 연두색에 이르기까지 없는 색깔이 없고, 화려하게 차려 입은 귀부인에서 떼지어 아우성치는 무리까지 없는 모양이 없다.
■필요에 맞는 색깔과 모습을 손쉽게 고를 수 있고, 수명까지 길어 의례나 행사용으로 국화보다 나은 꽃이 없다.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가 잇따르는 바람에 국화가 동이 났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연례 국화 축제가 열리고 있는 데다 인천 세계도시축전에서도 '억만 송이 국화 축제'가 각광을 받고 있다. 염계는 부귀의 꽃인 모란만 사랑하는 세태를 한탄했지만, 국화 사랑이라고 다를 게 없다. 천만 송이니, 억만 송이니 하는 물량 공세가 아닌 동네 꽃밭이나 생활 주변의 작은 전시회에서 국화 향기에 젖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이유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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