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미디어 관련법 권한쟁의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절차상 위법은 인정되지만 법안 가결은 무효로 볼 수 없다"로 요약된다.
헌재는 절차에 대한 판단과 법안의 효력에 대한 판단을 분리하는 방법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여ㆍ야의 손을 각각 들어줬다.
절차의 위법 부분은 야당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법안 처리 자체는 유효하다고 판단해 실질적으로 미디어 관련법의 위상에는 아무런 손상이 가지 않는 결론을 택했다. 이는 헌재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자율성을 존중해주려는 '사법소극주의'의 태도를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대리투표 있었다" 판단
우선 신문법 처리 과정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대리투표를 한 사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9명의 재판관 중 5명이 대리투표 사실을 인정하며 표결 절차에 위법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강국 이공현 조대현 김희옥 송두환 재판관은 먼저 "표결 과정에서 다른 국회의원의 단말기에 접근하거나 손을 가까이 대는 등 정상적 표결 절차에서 결코 나타날 수 없는 극히 이례적인 투표행위가 다수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회의원의 표결권은 고유한 권리로서 이를 타인에게 위임ㆍ양도할 수 없다"며 "사용 권한이 없는 단말기를 사용하는 것은 그 동기나 경위가 어떻든 간에 국회법에 위배되어 다른 의원의 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다른 3명의 재판관은 대리투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실제 표결 결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가 확인되지 않아 위법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을 냈다.
민형기 이동흡 목영준 재판관은 "증거에 따라 인정되는 '권리없는 투표' 3건 중 이사철 의원은 재석 버튼을 다섯 번 누른 것이 확인되나, 다른 2건은 어떤 버튼을 눌렀는지와 버튼을 누른 경위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 밖에 김종대 재판관은 "국회 본회의 회의록이 아닌 증거(영상자료)로는 권한 행사의 적법성을 판단할 수 없다"며 적법 의견을 냈다.
■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 원칙 위배
방송법 표결 당시 1차 투표가 정족수에 모자라 재투표를 한 데 대해서도, 과반수 재판관이 '일사부재의' 원칙을 위반한 것으로 봤다. 일사부재의 원칙은 회기 중에 부결된 안건은 동일 회기 내에 다시 상정할 수 없도록 하는 국회법 조항이다.
조대현 김종대 민형기 목영준 송두환 재판관은 "투표 집계 결과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에 미달한 경우는 물론,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못 미친 경우도 부결로 확정됐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근거로 "피청구인인 국회의장이 방송법안에 대한 부결 의사를 무시하고 재표결을 실시하여 그 결과에 따라 방송법안 가결을 선포한 것은 일사부재의 원칙을 위배하여 청구인들의 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이강국 이공현 김희옥 이동흡 재판관은 표결 과정에서의 '의결능력'과 '의결방법'을 구분하는 논리를 제시하며 방송법 재투표를 적법으로 간주했다.
4명의 재판관은 "의결 정족수(재적의원 과반수 출석)는 의결의 전제 요건인 의결 능력에 대한 규정이고, 다수결의 원칙은 의결의 방법에 대한 규정이다"고 전제했다. 이어 "의결 정족수에 미달한 국회의 의결은 유효하게 성립한 의결로 취급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1차 투표는 의결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찬성이냐 반대냐를 따질 필요도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2차 투표를 재의(再議)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제안 취지 설명 및 질의ㆍ토론 생략
투표 당일인 7월 22일 이윤성 국회부의장이 신문법, 방송법, 금융지주회사법 등을 본회의에 직권 상정하면서 제안 설명 및 질의ㆍ토론을 생략한 것도 절차상의 위법을 가리는 중요 쟁점이었다. 국회법은 상임위 심의를 거치지 않은 본회의 안건에 대해서는 제안자가 그 취지를 설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신문법에 대한 제안 취지 설명을 생략한 데 대해서는 이강국 소장을 비롯한 6명의 재판관이 적법 의견을, 3명의 재판관이 위법 의견을 냈다.
다수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국회의원들이 신문법 수정안을 표결할 때 법률안의 취지와 내용을 알았던 것으로 보이고 이미 수정안 내용이 e-의안시스템에 입력되어 있었다"며 제안 취지 설명을 생략할 수 있다고 봤다. 방송법에 대해서는 9명 재판관 전원이 제안 취지 설명 생략을 적법으로 판단했다.
신문법 처리에서 의원들의 질의ㆍ토론을 받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6명이 "위법한 절차"로 단정했다. 이강국 조대현 김희옥 송두환 재판관은 "심의절차는 표결과 마찬가지로 국회의 의사결정에서 생략할 수 없는 핵심절차이며 국회 입법절차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밝혔고, 김종대 이동흡 재판관은 "질의 확인 절차도 없이 곧바로 표결 처리로 들어간 것은 국회의장의 자율적 권한을 넘어선 행위"라고 못박았다.
그러나 방송법 처리에서 질의ㆍ토론을 생략한 부분에 대해서는 적법 5명, 위법 4명으로 결론이 뒤집혔다.
■ 신문법ㆍ방송법 가결 자체는 유효
헌재는 미디어법 표결 처리 과정에서 대리투표가 있었던 사실을 인정하고 방송법 재투표가 일사부재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판단하면서도 신문법 등 4개 법안을 가결 선포한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무효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신문법 가결의 유효 여부에 대해서는 9명의 재판관으로부터 6개의 각기 다른 의견이 나왔으나 유효 6, 무효 3명으로 정리됐다. 신문법안 처리 과정을 적법으로 판단한 민형기 목영준 재판관은 당연히 그 결과도 유효하다고 봤다.
이강국 이공현 김종대 이동흡 재판관은 신문법 처리 과정에 일부 권한 침해가 있다고 판단했으면서도 "위헌ㆍ위법의 시정은 국회에 맡겨두는 게 옳다"며 유효 의견을 냈다.
이에 대해 조대현 송두환 김희옥 재판관은 "질의ㆍ토론 절차가 생략돼 국회 의결을 국민의 의사로 간주하는 요건이 갖춰지지 않았고, 표결 과정에 문제가 있어 표결 결과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무효 의견을 냈다.
특히 이들 3명의 재판관은 "절차의 권한 침해를 인정하면서 그 시정 문제를 국회 자율에 맡기는 것은 헌재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방송법에 대해서는 7명의 재판관이 법안 가결을 유효로 판단했고, 2명만 절차의 위법에 따른 무효 의견을 냈다. 이강국 이공현 김희옥 재판관은 절차와 법안 가결을 둘 다 적법하다고 봤고, 민형기 이동흡 목영준 재판관은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 및 법률안 심의절차를 위반한 점은 인정되나, 법안 자체를 취소 또는 무효로 할 정도의 하자는 아니다"고 봤다.
김종대 재판관은 "권한쟁위 사건에서 헌재의 판단은 심의ㆍ표결권을 침해했다고 확인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조대현 송두환 재판관은 "질의ㆍ토론 생략 및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의 하자가 있어 법안도 무효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