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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의 길 위의 이야기] 天地無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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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의 길 위의 이야기] 天地無用

입력
2009.10.30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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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회사의 대형 트럭이 횡단보도를 막고 서 있다. 배달을 갔는지 운전기사는 보이지 않고 열린 짐칸으로 온갖 주종의 술들이 보인다. 생맥주에서부터 외국산 병맥주까지, 지난 밤 내가 홀짝인 맥주도 보인다. 그 동안 내가 마신 술이 한 트럭이나 될까, 그러다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더듬더듬 읽어야 하는 일본어 가운데 천지무용(天地無用)이라는 한자가 한눈에 띈다. 보행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 단어의 뜻을 생각해보았다.

문득 떠오른 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뜻의 단어가 이도저도 아닌 술 상자들 틈에, 술 상자로 보이는 상자 위에 적혀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잘못 보았을까, 다시 읽었는데 천지무용이 맞다. 어두워지면 홍대의 술집들은 손님들로 꽉 찬다. 술을 마시는 일 말고 우리가 만나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 어제 상의를 하기 위해 만난 분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약간의 술이 오갔다.

화기애애한 시작과는 달리 끝에는 오해만 불러일으켰다. 그날 밤 해야 할 일은 손도 대지 못하고 다음 날에는 지각까지 했다. 그러니 느닷없이 만난 그 단어가 무슨 계시처럼 보일 수밖에. 사무실에 도착해 검색해보니 전혀 딴판의 의미이다. 천지무용. 화물의 위아래를 거꾸로 하지 말라는, 상자 안에는 취급주의를 요하는 고급 술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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