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회사의 대형 트럭이 횡단보도를 막고 서 있다. 배달을 갔는지 운전기사는 보이지 않고 열린 짐칸으로 온갖 주종의 술들이 보인다. 생맥주에서부터 외국산 병맥주까지, 지난 밤 내가 홀짝인 맥주도 보인다. 그 동안 내가 마신 술이 한 트럭이나 될까, 그러다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더듬더듬 읽어야 하는 일본어 가운데 천지무용(天地無用)이라는 한자가 한눈에 띈다. 보행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 단어의 뜻을 생각해보았다.
문득 떠오른 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뜻의 단어가 이도저도 아닌 술 상자들 틈에, 술 상자로 보이는 상자 위에 적혀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잘못 보았을까, 다시 읽었는데 천지무용이 맞다. 어두워지면 홍대의 술집들은 손님들로 꽉 찬다. 술을 마시는 일 말고 우리가 만나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 어제 상의를 하기 위해 만난 분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약간의 술이 오갔다.
화기애애한 시작과는 달리 끝에는 오해만 불러일으켰다. 그날 밤 해야 할 일은 손도 대지 못하고 다음 날에는 지각까지 했다. 그러니 느닷없이 만난 그 단어가 무슨 계시처럼 보일 수밖에. 사무실에 도착해 검색해보니 전혀 딴판의 의미이다. 천지무용. 화물의 위아래를 거꾸로 하지 말라는, 상자 안에는 취급주의를 요하는 고급 술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설가 하성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