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샛강으로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 안개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
기형도의 시 <안개> 의 한 구절이다. 영화 <파주> 를 보며 기형도의 시가 생각났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푸르스름한 안개의 입자 속에 갇혀 있던 주인공과 택시는 절박하게 비상등을 켜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점멸의 순간은 주인공의 언니가 가스 사고로 죽은 날, 번쩍이던 소방차의 경광등으로 이어진다. 안개 속에서 구조해 달라는 신호와 구조해 주겠다는 신호가 여기저기 점멸하지만, 안개가 너무 자욱한 그 도시, 파주에서 그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안개 속에 갇혀 있고, 비명은 침묵으로 변화한다. 파주> 안개>
영화 평을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형부와 처제의 숨겨진 두터운 감정의 선을 따라가는 영화 <파주> 를 보면서 용산 참사가 떠오르고, 김승옥의 <무진기행> 을 다시 읽고 싶고, 기형도의 시 <안개> 가 생각이 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영화에서 소설에서 시에서 이토록 자주 안개가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무엇이 이 길다란 짐승의 혀처럼 축축한 기억을 우리 모두에게 흩뿌려 주었나. 안개> 무진기행> 파주>
영화 <파주> 의 주인공 자매가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던 집은 결국 철거 투쟁에 들어가면서 쓰레기 더미와 구호와 낙서가 뒤덮인 폐허가 된다. 그곳에선 질투와 사랑이 혼동이 되고, 가해자와 피해자도 모두 뒤바뀌어 있다. 중식은 언니의 가스 사고 때문에 보험 사기로 의심 받고, 그런 중식을 처제인 은모 역시 의심한다. 사실 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없다. 사랑의 공모조차 불가능한 곳. 그리곤 파주의 집들은 서서히 제 기능을 상실해 버린다. 처음엔 아마도 자매의 보금자리였을 그 곳은 세입자가 왔다가 가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물도 들어오지 않는 공터로 변모했다. 파주>
어쩌면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 현실과 이상이 괴리된 60년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었다면, 기형도의 <안개> 가 폭압적인 80년대의 사회적 자화상이었다면, 이제 <파주> 는 모든 것이 자본주의로 치환되고 폭력이 난무하는 2000년대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지. 파주> 안개> 무진기행>
은모는 <파주> 에서 영화 내내 어떤 성과 연관된 은밀한 위협을 경험한다. 반말하는 운전기사부터, 나이트 클럽 기도, 지나가는 행인까지 모두 은모에게 성적인 뉘앙스가 배인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사람들이 살아 나가는 주거의 공간이 돈 다발로 계산되고 이웃과 함께 웃고 울던 그 공간이 투쟁과 죽음이 화염병과 신나가 함께 나뒹구는 공간이 되는. 용산의 참사와 영화 속 폐허가 겹치는 환영, 실제의 은모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재재거리며 이태원 거리를 걷는 환영을 보게 된다. 파주>
이제 '안개'는 우리 문단과 영화의 익숙한 메타포가 되었다. 무진. 영화 <파주> 에서 은중과 중식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때마다 남자는 (감옥에) 갇히고 여자는 (고향을) 떠났다. 이 안개는 언제 걷힐까. 우리는 모두 안개의 주식을 나눠 가지고 있다. 시대는 안개의 몸을 빌어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은 이러한 징후를 알까 말까. 안개에 혀가 잘리어지면 그뿐. 파주>
오늘 아침에도 한강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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