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의 가로수들도 조금씩 색이 들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떠나기로 했다. 가을 단풍을 맞으러 가는 길이다.
영동고속도로에 접어들면서 단풍 구경은 본격화했다. 강원도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단풍도 더욱 짙어져 갔다. 황홀한 단풍 빛에 마음도 함께 달뜨기 시작했다.
목표지는 단풍으로 유명한 치악산의 부곡계곡이다. 동치악에 숨은, 사람 손길이 덜 탄 비경의 단풍 코스다.
새말IC에서 나와 강림으로 접어드는 길. 주천강변 기암 절벽이 울긋불긋하다. 기암과 단풍이 이뤄낸 조화, 황홀한 그림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부곡2리의 솔거리마을을 지났다.
등산로 입구까지는 차 한 대 겨우 지날 좁은 마을길로 이어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등산로 입구엔 차 댈 곳에 턱없이 부족했다. 먼저 온 승용차 5대만으로 주차 공간은 꽉 찼다. 마을로 다시 내려와 밭 한 귀퉁이에 차를 대고 걸어 올랐다.
국립공원 탐방안내소 안내판에는 등산 코스와 함께 탐방 등급표가 붙어 있었다. 부곡_곧은치 구간은 C등급, 초보자 코스란다.
A는 숙련, B는 경험, D는 산책 코스다. 부곡매표소에서 곧은치까지 왕복 3시간 25분. 거리는 8.2km라고 적혀 있다. 현 위치 고도가 520m, 정상은 820m이니 300m만 올리면 된다.
좁은 길로 등산로가 이어졌다.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물소리가 가까워졌다. 곧은치 거의 다 올라갈 때까지 계속 왼편에 물길을 달고 올랐다. 가을의 계곡 물소리는 물빛만큼이나 말갛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켜 드는 햇살이 목덜미를 따뜻하게 했다.
셀로판지처럼 단풍을 통과한 붉고 노란빛이 하얀 암반의 계곡 위로 내려앉았다. 외길의 등산로지만 빨리 올라가지 못했다. 옆의 계곡이 자꾸만 내려오라 유혹하기 때문이다. 계곡으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느라 산행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맑은 소가 있어 감탄하고 나면 그 위에 더 크고 아름다운 소가 기다리고 있다. 물에 떠내려오는 단풍이 예뻐 사진에 담고 나면 더 빨갛게 물든 단풍잎들이 무리를 지어 흘러내려 왔다.
계곡물 옆 커다란 바위가 있어 걸터앉았다. 마침 점심때라 조촐한 도시락으로 출출한 속을 채웠다. 바위 아래는 물이 멈춘 듯한 널따란 소다. 신갈나무 낙옆들이 물을 가득 덮고 있었다. 정한 물, 그 위에 정지된 채 떠있는 이파리들. 말간 물 속에 가을이 풍덩 빠져, 그대로 멈춰 버린 듯하다.
등산로엔 벌써 낙엽이 수북하다. 발길에 채이는 가을을 씹으며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겼다. 곧은치 1km 남겨두고 잠깐 하늘이 열렸다. 하얀 억새가 바람에 흔들린다.
저 멀리 건너편엔 빨갛게 물든 봉우리들이 병풍을 치고 있었다. 하얀 억새와 색색의 단풍. 억새는 밤새 붓이 되고 산자락은 캔버스가 되었다.
곧은치 정상 직전, 소나무 숲 사이로 길은 한없이 편하게 굽이쳐 오른다. 걸음이 편하도록 나무계단이 설치돼 있다.
드디어 곧은치 정상에 섰다. 아쉽게도 시야가 열리지 않았다. 그냥 내려가긴 섭섭해 주변의 다른 산행객에 여쭸더니 가까운 곳의 헬기장에 가면 크게 열린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했다. 5분 거리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에 신이 나 겅중겅중 뛰어올랐다.
오솔길 끝에서 만난 헬기장. 아주머니 10여 명이 모여 원주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짙게 드리운 단풍산 너머로 원주 시내가 넓게 열렸다. 낯선 남자가 다가가서인지 노래를 부르고 있던 아주머니들이 갑자기 노래를 멈췄다.
묘한 긴장감 속, 애써 모른 척 사진을 찍어 대곤 서둘러 되돌아 내려왔다. 곧이어 귀 뒤에선 노랫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붉게 물든 산자락으로 단풍에 잔뜩 취한 여인의 가락 장단이 짙게 퍼져 나갔다.
횡성= 글ㆍ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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