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귀족스포츠의 대명사 펜싱. 제1회 아테네올림픽이 열린 1896년부터 금메달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검객이 휩쓸었다. 전설적인 검객 라몬 폰스트의 조국 쿠바를 빼면 유럽이 약 100년간 올림픽 금메달을 독식했다.
한국 펜싱의 대명사 김영호(38)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자 플뢰레에서 유럽의 벽을 허물고 금메달을 수확했다. 2007년 대한체육회로부터 최우수지도자로 선정될 정도로 지도자로서도 성공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2008년 국가대표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야인으로서 일반 학생을 대상으로 검술을 가르치고 있는 펜싱 영웅을 서울 압구정동에 자리잡은 로러스 펜싱 클럽에서 만났다.
논두렁 누비던 나무칼 검객
"언제 펜싱을 시작했냐고요? 중학교 2학년 때였죠. '땅땅땅.''얏!' 쇠소리와 기합소리에 반했습니다." 시골 논두렁에서 칼싸움을 통해 '장군' 흉내를 내던 소년 김영호. 그는 충남 연산중 1학년 때 "난 무조건 펜싱을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충남기계공고 3학년 시절 김영호는 전국대회를 모두 휩쓸어 '천재'란 평가를 받았다. "사실 첫 눈에 반한 여학생을 꼬시려고 죽기살기로 펜싱에만 매달렸죠. 그때 실력이 엄청나게 늘어 국가대표가 됐고, 결국 그 여학생을 아내(김영아)로 만들었죠."
새하얀 펜싱 도복과 해맑은 여학생의 미소에 반한 김영호는 펜싱에 인생을 걸었고, 한국 펜싱 사상 세계선수권대회 첫 메달(1997년 은메달)과 올림픽 첫 금메달(2000년)의 주인공이 됐다.
펜싱 사상 최고의 명승부
"너는 죽었다. 내가 펜싱을 그만둬도 좋다. 넌 죽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1997년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전. 팔 근육이 마비된 김영호는 이를 악문 채 옷핀으로 팔을 마구 찔러댔다. 당시 김영호는 팔에 쥐가 나 칼을 든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11-1로 앞선 세르게이 골로비츠키(우크라이나)는 경기 도중 김영호를 붙잡고 춤췄다.
옷핀에 무수히 찔린 팔에서 피가 솟구치자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넌 죽었어"를 외친 김영호는 미친 듯 칼을 찔러댔고, 12-12 동점을 만들었다. 14-14 동점에서 마지막 공격이 성공했다. 그러나 한국 펜싱 사상 첫 금메달의 꿈은 깨졌다. 기계 오작동으로 득점이 인정되지 않아 결국 김영호의 14-15 패. 김영호와 골로비츠키의 대결은 지금까지 펜싱 역사상 최고의 승부로 손꼽힌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일군 올림픽 金
승승장구하던 김영호는 98년 좌절했다. 98방콕아시안게임 2관왕을 노렸지만 은메달에 그쳤고, 연말에는 폐가 찢어져 기흉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곧바로 칼을 잡았지만 숨이 차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부터 아침, 저녁으로 매일 태릉선수촌 불암산을 달린 끝에 예전 실력을 되찾았다.
"사실 96애틀랜타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기대했어요. 8강에서 우승후보를 상대로 13-11로 이기고 있었는데 순간의 방심으로 역전패했죠. 2000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몸상태와 실력에서 최고였지만 금메달을 따려면 뭔가 다른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영호는 2000년 3월부터 각종 국제대회에서 모습을 감췄다. 펜싱 강국 독일 등에서 자신의 기술을 비디오로 낱낱이 분석하면 승산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다. 그동안 노출된 기술과 작전을 바꾼 김영호는 시드니올림픽에서 승승장구한 끝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펜싱은 상대 칼이 가슴 앞 1㎝ 앞에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 막으면 상대를 찌를 수 있지만 미리 막으면 반격할 기회조차 없거든요." 지도자로도 세계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김영호는 일반 학생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이상준 기자 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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