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로 내려친 듯 90도로 일어선 절벽. 암벽에 박힌 퀵 드로우(Quick Drawㆍ두 개의 카라비너를 단단한 섬유로 연결한 장비)를 양 손으로 움켜쥐었다.
매끈한 암벽에는 굴곡도 없어 암벽화를 신었지만 다리로는 버티기가 힘겨웠다. 오로지 팔 힘으로만 움직여야 하는 구간. 오른손을 뻗어 두 번째 퀵 드로우를 잡고 이동해야 하는데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미 40여m를 올라온 터라 도망갈 곳도 없었다. 목젖을 꿀꺽거렸지만 입에는 단 한 방울의 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자는 고작 1m 남짓 떨어져 있는 퀵 드로우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설상가상, 힘이 빠지자 다리가 조금씩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저걸 어째" "떨어지겠네"라며 암벽 아래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한 마디씩 내뱉는 소리가 귀에 들어와 꽂혔다.
두 손을 놓아 버려도 안전 로프 덕분에 추락은 면하겠지만 당최 '대롱대롱' 매달린다는 것을 자존심이 허용치 않았다. 안전 로프를 잡고 있는 4년 경력의 여성 등반인 이달님(28)씨 보기도 부끄러웠다.
하는 수 없이 허리 안전벨트에 연결된 확보 줄을 퀵 드로우 끝 카라비너(여닫을 수 있는 강철 고리)에 끼웠다. 한 가닥 줄에 의지한 채 추위와 긴장으로 뻣뻣해진 손가락을 비벼댔다.
카라비너 하나를 잡고 오른쪽으로 이동, 확보 줄을 끼우고 쉬기를 반복하면서 10m도 안 되는 수평 이동 구간을 20분 만에 가까스로 벗어났다.
이곳은 해발 810m 북한산 인수봉 서남벽, 총 60m 구간 중 정상을 10여m 앞둔 지점. 암벽 중간 움푹 꺼진 곳에 다리를 놓았다. 팔다리는 이미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덜덜 떨렸고, 넋이 나간 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인수봉을 끌어안고서 깊은 한숨을 예닐곱 번 쉬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발 아래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풀 한 포기 없이 매끈한 살결을 드러낸 인수봉 아래, 바람에 하늘거리는 단풍은 불꽃인 양 일렁였다. 아니, 사방이 불의 향연이었다.
몸을 돌려 바위를 등진 채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 우뚝 선 북한산의 정상 백운대(836m)를 경계로 왼편으로는 서울 강북구와 도봉구의 아파트 단지, 오른편으로는 고양시 덕양구의 신시가지가 펼쳐졌다. 기자는 한 마리 새가 된 듯 고지에 서서 그저 '와아'하는 탄성을 연발했다.
"정상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물기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교육을 맡은 김성기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의 말을 기자는 잽싸게 가로챘다. "선생님, 이 정도면 체험은 충분합니다." 이어진 수직 하강. 한 줄기 로프를 손바닥만한 8자 형태의 하강기에 끼우고 마찰력을 이용해 제동을 걸면서 내려가는 기술이다.
허리를 굽혀 몸을 'L'자로 만들고 발은 앞꿈치부터 가볍게 암벽에 대면서 뒷걸음을 치듯 걸어 내려가는 비교적 간단하고, 힘이 들지 않는 과정이었다. 드디어 발이 땅에 닿았다. "하강 완료"를 외쳤다. 익숙한 감촉,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게 이토록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정상 목전에서 겁을 집어먹고 볼썽 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기는 했지만 수평 이동 구간에 닿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쓸만했다. 산 사나이 김성기 강사와 5년 경력의 김한진(26)씨가 번갈아 선두를 서고 로프를 던지면 그걸 안전장치 삼아 올라갔기 때문에 힘은 들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온전히 쓸 때까지는 내심 '이거 뭐 별거 아니군'이라는 자만심도 가졌었다. 수직벽을 평지처럼 오르는 김씨의 흉내를 내 보기도 했다. 바위의 갈라진 틈을 잡고 다리의 반동을 이용해 살짝 뛰어오르기도 감행했었다. 그러나 들뜬 마음에 초반에 힘을 너무 써 버렸다.
등반 경험이 전무한 '생초보'에게 인수봉 등반은 애초부터 무모한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도전해 볼 만한 목표이기도 했다.
김성기 강사는 "암벽등반은 곤란한 문제(암벽)를 스스로 선택해서 해결해 내는 과정을 즐기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그의 말대로 상당한 곤란을 겪었지만 문제를 해결한 뒤 몰려오는 성취감은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았을 때와 견줄 만했다.
암벽등반은 집중력이 높이는 데도 더없이 좋은 레포츠다. 살기 위해 몰두한다는 점에서 즐기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여타 레포츠와는 차원이 다르다.
김 강사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가 심해 약물치료에도 효과를 보이지 않던 초등학생이 암벽등반을 배운 지 2년 만에 정상 생활을 하게 됐다"며 "나조차 놀라운 효과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 강사는 "암벽등반을 배우면서 우울증을 극복한 여성들은 셀 수 없이 많다"고 덧붙였다.
산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산하는 길, 김성기 강사가 어깨를 툭 치며 농담을 건넸다. "세상에는 인수봉에 오른 사람과 오르지 못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죠. 오늘 인수봉에 오른 사람 부류에 합류한 겁니다." 으쓱한 기분에 어깨가 절로 펴졌다. 산이 있어서 산에 오르는 게 아니라 암벽이 있어서 산에 오르는 게 아닐까.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 목표는 살아서 돌아오는 것…
암벽등반 최대의 목표는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생환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장비를 갖추고 옷을 입으며 가방에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이다. 산에 오르기 전 제대로 교육을 받는 것도 같은 이유다.
코오롱등산학교(www.mountaineering.co.kr)는 6주일 정규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기초 암벽등반 기술부터 북한산 인수봉 노적봉을 오르는 실기가 포함된다. 암벽등반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자를 위한 과정으로 대상은 16세 이상이고, 비용은 35만원.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경기 과천시 코오롱타워 별관에서 이론 수업을 받은 후 토요일과 일요일 북한산 백운산장에서 합숙하면서 실기 교육을 받는다.
1주차에는 매듭법과 장비 착용법, 2주차에는 확보와 하강 등 기초 등반 기술, 3주차에는 바위의 갈라진 틈(크랙) 잡고 오르기 등을 배운다.
4주차 이후는 조별 등반을 통해 배운 기술을 숙달하는 과정이다. 등반 전문가가 운영하는 권기열등산학교(www.rocknice.co.kr) 김용기등산학교(www.kimcs.com) 정승권등산학교(www.climbingschool.co.kr) 등 전문 아카데미를 통해서도 제대로 된 수업을 받을 수 있다.
등산학교에 들어가면 안전벨트 헬멧 하강기 카라비너 등 기본 장비를 2만원 정도에 빌려 쓸 수 있지만 암벽등반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개인 장비를 구입하는 게 좋다. 장비를 고를 때는 국제산악등반연맹(UIAA)이나 유럽품질인증(CE) 마크가 붙은 제품을 구입해야 믿을 수 있다.
암벽화는 부드러운 가죽에 마찰력이 강한 부틸고무 밑창을 붙여 만든 것으로 딱딱한 일반 등산화와 다르다. 발에 꼭 맞는 제품을 선택해야 제대로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 안전벨트는 추락할 때 등반자를 보호해 주는 필수 장비다.
허리를 감싸는 허리벨트와 허벅지를 감싸는 다리벨트, 두 벨트를 잇는 슬링으로 구성된다. 암벽화 안전벨트 헬멧의 가격은 각각 10만원 안팎.
카라비너 5개, 하강기, 초크(미끄럼 방지를 위해 손에 바르는 탄산마그네슘 분말) 등 기본 장비를 포함해 50만원 정도면 한 세트를 장만할 수 있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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