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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6> 다산이 다산이 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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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6> 다산이 다산이 된 까닭

입력
2009.10.28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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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은 1801년(순조 1) 2월에 신유사옥에 걸려 장기와 강진(康津)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대학자가 될 사람을 이와 같이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시킨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다산은 그 해 11월에 강진 성문 동쪽 시냇가 자갈밭에 있는 성수봉이라는 하급관리의 집에서 6년을 보냈다. 강진 사람들은 유배인을 싫어해 그 집의 대문을 부수거나 담장을 헐어버렸다. 다행히 동문 밖 주막의 노파가 받아주어 골방에서 귀양살이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골방을 사의재(四宜齋)라 했다. 마음은 담박해야하고, 용모는 장엄해야 하고, 말은 어눌해야 하고, 동작은 중후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40평생을 과거공부 10년, 벼슬 12년을 했는데 이제는 한강을 건너고 조령을 넘어 바닷가 대나무 숲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는 것을 한탄했다. 한밤중에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나 세상을 한탄하고 술을 들이키기도 했다.

다산은 1806년(순조 6)에 제자인 이청의 집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윤단의 다산서실로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 스스로 다산초당을 짖고 귀양에서 풀려날 때까지 오직 공부만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다산은 곧 안정을 되찾고 악에 받쳐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한다. 죄인의 몸으로서 생사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주역> 을 먼저 열심히 연구했다. 그는 <주역사전(周易四箋)> 을 "내가 하늘의 도움을 받아 지어낸 책이요, 절대로 사람의 지혜나 생각으로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자부했다. 그리고 시간이 없어 연구하지 못했던 6경4서를 깊이 연구했다.

서학의 관점에서 경전을 해석하기 보다는 천주와 유사한 상제를 설정하고 있는 공자ㆍ맹자의 수사학(洙泗學)으로 경전을 재해석했다. 그는 <상예사전(喪禮四箋)> 에 대해 "내가 성인을 독실하게 믿고 지은 책으로 미친 듯한 물결을 돌리고 온갖 시내를 막아 수사(洙泗)의 물결의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새로운 다산의 실학사상이 태어난 것이다. 그가 일찍이 탐독했던 서학서도 일조를 했다. 책이 많지 않으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다행히 강진에 외가인 해남 윤씨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서를 활용할 수 있었다.

다산은 그의 책이 영남에 전해지기를 바랐다. 자기와 같은 남인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1818년(순조 18)에 김조순에 의해 풀려났다. 친구인 김이교가 초당에 들렸을 때 해배해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고 그저 부채에 시 한 수만 써 주었는데 그 시를 보고 다산이 생각나 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18년이나 준재를 썩힌 것은 다산 개인은 물론 모두에게 통탄할 일이지만 이러한 준재로 하여금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 세계적인 석학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홍복이다. 그가 만약 일생 동안 관직생활에만 매달렸다면 비록 고관대작은 되었을지언정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석학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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