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의류업체인 한세실업 기업설명회(IR)일로 이달 초 베트남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이 회사는 호치민시 인근 구치에서 부지 10만평의 대규모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업체로, 현지 근로자 1만명을 두고 4억~5억달러 상당의 의류 전량을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생산해 수출해오고 있다.
4박5일간의 베트남 체류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는데, 독특한 화폐거래 관행이 눈에 띄었다. 체류기간 중 현지 안내인은 '미국 달러화를 사용하고, 동화(베트남 화폐단위)로 거스름 돈을 받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다.
1만동 지폐가 조금이라도 훼손되면 9,000동 정도로 평가되는 등 낡은 지폐는 액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데 물정 모르는 외국인에게 이런 헌 지폐를 거스름 돈으로 내준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권위가 추락한 나라지만 베트남은 겉보기에 희망에 부푼 나라였다. '20년 뒤에는 한국처럼 잘 살 수 있다'는 공산당 지도부의 설득을 대부분 국민이 믿고 있는 듯 했다.
한세실업에 따르면 베트남 근로자의 노동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처럼 젓가락을 사용하는 탓인지 손놀림이 정교하고 천성도 근면하다. "지난해 말 중국 공장을 폐쇄한 대신, 베트남 비중은 확대할 계획"이라는 이용백 사장의 설명에 베트남의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일감이 몰려도 공장은 하루 8시간만 가동할 수밖에 없다 걸 알고는 생각이 흔들렸다. 나이키 월마트 등 원청업체들이 '노동착취' 비난을 피하려고 '1일 8시간 이상 노동'은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의 부모ㆍ형제에게 돈을 더 보내고 싶어도 구치의 1만명 근로자 모두 월 150달러 임금에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국적 기업의 이런 정책은 미시적으로는 세심한 배려이지만, 거시적으로는 성장의 장애물일 수 있다. 베트남처럼 축적된 자본과 기술이 없는 나라가 경쟁국을 추월하는 방법은 '더 많이 일하는 것'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가난 탈출이 쉬운 게 아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한국의 '1세대 경영자'가 떠올랐다. 우리가 베트남 처지였던 1960년대 차관을 주는 선진국도 '중화학 대신 수입품을 대체하는 경공업 위주 정책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다. 그런 견제를 뚫은 것은 지금은 상상도 못할 돌파력을 지닌 당시 경영자였다.
베트남 사례와 재벌 총수를 연결시킨 것은 재벌 경영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주가와 경영자와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워렌 버핏이 국내 기업 중 신세계를 선호하는 것은 주위를 설득해 고객을 위해 신세계백화점 죽전점 영업 시간을 밤 10시까지 늘린 구학서 부회장의 경영방식 때문이라고 한다.
베트남 여행은 장기 투자자라면 재무제표를 들추기에 앞서 그 회사 대주주와 최고경영자(CEO)의 평판부터 살피는 게 먼저라는 점을 새삼 깨우치게 했다.
조철환 기자 chc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