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축구 강원FC가 대전 시티즌을 상대로 올해 K리그 시즌 마지막 홈경기를 치른 24일 오후 강원 강릉종합운동장. 양팀 선수 22명이 각자 에스코트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보통 에스코트는 어린이 몫이지만 이날은 주황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노인들이 아들ㆍ손자뻘 되는 선수들과 나란히 걸었다.
국내 축구계의 유일한 실버 응원단인 강원FC '우추리 응원단' 회원들이었다. 어르신들의 보무당당한 행진에 1만여명의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평소 좋아하는 강원FC의 크로아티아 출신 선수 라피치를 에스코트한 권오준(74) 할아버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말은 안 통하지만 눈을 보면서 응원했다. 서로 '파이팅'을 외쳐주기도 했다." 반면 김덕래(77) 할아버지는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우리팀 선수와 손잡고 입장하고 싶었는데 상대편 선수랑 붙여주드래요. 아쉽게 됐지 뭐야."
이날 에스코트는 올 시즌 내내 강원FC를 열렬히 성원해온 우추리 응원단을 위한 구단의 보은 행사였다. 강릉시 성산면 우추리(법정명 위촌리) 도배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응원단은 평균 연령이 68세이지만 열정만큼은 어떤 서포터즈와 견줘도 뒤지지 않는다. 이들은 강원FC 경기가 있을 때마다 40인승 버스를 빌려 20분 거리인 홈구장(강릉종합운동장)은 물론, 왕복 12시간 넘게 걸리는 전남 광양까지 응원을 다녔다.
3월부터 이날까지 열린 27번의 경기 중 딱 한 번 불참했는데 지난 3일 추석 연휴 중 경기 성남에서 열린 원정 경기였다. 김원동 강원FC 대표는 "추석에 경기 일정을 잡는 바람에 응원을 못했다는 어르신들의 항의가 대단했다"고 귀뜸했다.
우추리 응원단은 지난해 12월 강원FC 출범에 맞춰 결성됐다. 주로 농사를 짓는 우추리 주민 213명 중 만 60세 이상 노인 27명을 포함한 35명이 핵심 단원이다. 마을 최고령인 고재환(93) 촌장도 가끔 응원길에 나선다. 주민들은 강원FC 주식(액면가 5,000원)을 가구당 4주씩 갖고 있는 '구단주'들이어서 팀에 대한 애착이 더욱 크다.
함영진(48) 이장은 "강원도의 우수마을 지원 사업에 응모하려 시작한 프로그램인데, 마을 울타리 안에서만 살던 어르신들이 축구 응원을 다니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며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우추리 어르신들의 힘찬 응원이 시작됐다. 강원FC의 상징색인 주황색 5리터짜리 쓰레기봉투에 공기를 채운 뒤 경기 내내 양손에 들고 맞부딪치며 "필승 강원" "잘한다 잘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주로 20, 30대인 강원FC 공식 응원단 '나르샤' 회원 50여명도 북과 나팔 소리로 합세했다. 전반 5분만에 대전에 골을 허용한 강원FC는 응원에 화답하듯 곧 만회골을 넣으며 경기를 주도했다.
응원에 곁들이는 관전평도 날카로웠다. 박준각(72) 할아버지는 "사이드(측면)에서 센터링 올라오기 전에 막아야지" "공중볼은 안전하게 가슴으로 받아야지"라며 연신 연고팀을 채찍질했다.
이날 최고령 응원단원인 권태남(87) 할머니는 이을용 선수가 출전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을용이는 빡시리(열심히) 뛰어 좋제. 공 차는 기술도 좋아서 월드컵 때도 잘하지 않았나." 경기를 보는 안목이 이젠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지만 처음 응원을 다닐 땐 실수도 있었다.
지난 4월 광주 원정 경기에서 강원FC가 아닌 홈팀(광주 상무)을 응원한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할 사건이다. 홈 경기에선 주황색 유니폼을 입는 강원FC가 원정 땐 흰색 유니폼을 입는다는 걸 몰랐던 응원단은 그날 주황색을 입은 홈팀이 골을 넣자 구장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전반전이 1대1로 끝나자 한바탕 응원으로 출출해진 속을 채우는 만찬이 벌어졌다. 우추리 응원단은 경기 때마다 고구마전, 김치찌개 등을 준비해와 나르샤 회원들과 나눠 먹는다. 우추리와 나르샤는 축구를 통해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나르샤 회원 권현(24)씨는 "마을에 김매기나 추수 일손이 필요하면 나르샤 회원들이 가서 도와드린다"고 전했다.
후반전에도 선전하던 강원FC는 경기 30분을 넘어서며 밀리기 시작했다. 이종숙(66) 할머니는 "체력이 떨어진 모양"이라며 "최근 연패하는 것도 힘이 달려서 그런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강원FC는 후반 종료 직전 결승골을 내주며 결국 패했다.
이날까지 강원FC의 성적은 6승7무14패, K리그 15개팀 중 14위다. 심옥분(74) 할머니는 "얼른 마을회관에 불러다가 골메미(몸보신) 시켜야지"라며 "그래도 참 잘했드래요"라고 칭찬을 잊지 않았다. 최순호 감독과 선수들은 응원석으로 달려와 "다음 시즌엔 진 경기만큼 이기겠습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했다.
우추리 주민들은 시즌이 끝난 다음달 11일 선수들을 마을에 초청, 염소탕으로 '골메미'를 시킬 계획이다. 다음?1일 제주에서 열리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도 비행기를 타고 응원하러 간다.
글·사진 강릉=김현수 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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