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라고 애써 위로해 봤지만 아쉬움만 더해 간단다. 그 만큼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목소리엔 허탈감이 가득했다.
"괜한 자책감이 들면서 (제 자신에게) 화가 나더라고요. 피는 못 속이는 건지, 원…. 30여 년 기름밥 인생이라 어쩔 수 없나 봅니다.(웃음)" 우리나라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 궤도 진입 실패(2009년8월)를 받아 들여야만 하는 현실을 놓고 삼성테크윈 기능올림픽 훈련센터 대표 명장(名匠)인 황해도(48) 차장의 마음은 복잡했단다.
"우리 기술이 모자라서 그런 것을, 누굴 탓하겠습니까?" 한 때(2003~2007년) 한국우주항공연구원과 함께 인공위성 추진 발사체 엔진의 핵심 부품인 터보 펌프 모듈을 직접 개발했던 그였기에 나로호 실패에 대한 안타까움은 남다른 모양이다.
지난 달 24일 제44회 전국기능경기대회 제3경기장이 마련된 전남 광주시 전남공고에서 CNC 선반 분야의 심사위원을 맡은 황 차장을 만났다. 컴퓨터(PC)가 내장된 회전 공작 기계로, 머리카락의 10분의 1보다 작은 크기의 쇠를 깎아내는 CNC 선반은 첨단 전자기기와 자동차, 일반 기계에 들어가는 정밀 부품 생산 설비다.
"이 아이들은 우리가 지나온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텐데요." 유난히 춥고 배고팠던 지난 시절이 떠오르는 듯, 행사장 주변의 응시생들을 둘러보던 황 차장의 시선은 하늘로 옮겨 갔다.
▲ 불우했던 가정 환경
황 차장의 이력은 말 그대로 눈부시다. 전국 기능경기대회 은상(선반ㆍ1981년)을 비롯해 국무총리 표창(2001년)과 대한민국 명장(2003년ㆍ생산기계), 석탑산업훈장(2004년), 신지식인(2005년ㆍ행정자치부) 및 기능한국인(2006년ㆍ노동부) 선정 등의 굵직한 타이틀을 보유한 스타 기능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국내 최초 위성체 '우리별 1.2호' 핵심 부품 제작(1990~1991년)과 국내 최초 액체로켓 개발(1995년) 등도 그의 손을 거쳤다.
하지만 이 같은 화려함 뒷면에 순탄치 않았던 황 차장의 어린 시절이 숨겨져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아버님은 돌아 가시고 어머님도 개가를 하셨어요. 졸지에 저는 누나, 동생과 함께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어요. 큰 아버님 집에 붙어 살면서 새벽엔 신문 돌리고, 저녁엔 큰 아버님의 일을 도우며 간신히 중학교를 마쳤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등학교 진학은 사치였다.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그가 선택한 곳은 마산의 한 철공소. 그 때만해도 손에 기름 때만 묻히면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은 없던 시절이었다. 철공소 '초짜 견습공'으로 들어간 그에게 주어진 일은 고참들의 세숫물 준비와 일과 후 작업장 청소가 전부였다. 고참들 어깨 너머로 기술을 조금씩 익혀 갔지만, 발전 가능성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자격증이 필요했다.
▲ 스승을 만나다
그래서 그가 찾은 곳은 창원의 직업전문학교. 하지만 그는 이 곳에서 생애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성질이 엄청나게 급한 제 바로 윗 고참이었어요. 이 사람은 제품을 깎아서 조립하는 것까지 정확하게 딱 한번만 보여줍니다. 그리고선 똑같이 만들라고 하죠. 만약, 조립 순서가 틀리거나 원했던 제품이 안 나오면 여지없이 작살이 났어요. 쇠망치든 쇠파이프든 주변에 손에 잡히는 것은 뭐든 집어 던졌거든요. 제 머리도 여러 번 깨졌습니다."
'기술'이란 삶의 나침반을 찾게 해준 스승에 대한 존경심에서였을까. 생사를 넘나들었던 과거 일화를 전하면서도 황 차장의 얼굴에선 연신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당시 하루 18시간씩 고되고 힘든 강훈련을 이겨낸 황 차장은 결국, 1981년 전국기능대회 선반 분야에서 2등을 차지했고 이를 계기로 삼성테크윈(옛 삼성정밀공업ㆍ1984년)에 입사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 이젠 후배 양성에 전념
삼성테크윈에 둥지를 틀고 나서도, 황 차장의 '기술 개선과 창안'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신참이 너무 설친다'는 따가운 눈총 속에서도 회사내 업무 개선과 품질 향상을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한 결과, 최우수 창안 제안상(1986ㆍ89년)을 수상했다.
학구열도 넘쳐났다. 1992년에 입학한 창원기능대도 2년 동안 밤잠을 설치며 노력한 끝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회사내 주요 부서를 돌며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던 황 차장이 2007년부터 현재까지 머물고 있는 곳은 기능올림픽 훈련센터. 이 곳에서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사내외 기능 인력들을 대상으로 옥석을 가려 쓸만한 인재로 키워내는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랄까. 조짐은 좋다. 올해 8월말 캐나다 캘거리에서 개최된 국제기능 올림픽에 선수단을 이끌고 감독 자격으로 참가한 황 차장은 당당히 금메달 2개를 따낸 것이다.
이제 은퇴 이후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황 차장은 단호히 손사래를 쳤다. "이제 시작인걸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더 다듬고 다듬어서 제2, 제3의 나로호를 성공적으로 날려 보낼 자식들을 제 손으로 키워내야 하거든요." 인생의 또 다른 터닝포인트에 들어선 그의 모습에선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 산학협력의 힘 '미래기술 산실로'
삼성테크윈은 국내 유수의 대학들과 산학협력을 통해 경쟁력을 한층 강화해나가고 있다.
산학협력은 기업과 대학이 공동으로 연구를 수행하며 기업은 연구에 필요한 전문 인력과 연구시설 등을 쉽게 확보할 수 있고, 대학은 연구비를 비롯해 연구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인프라를 지원받아 역량을 더욱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윈-윈'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지속적인 산학협력 활동을 진행해 온 삼성테크윈은 지난 2008년4월 고려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서울대와 카이스트, 연세대, 한양대, 성균관대 등과 함께 산학공동연구센터를 개소하고 중장기 성장을 위한 핵심 기술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산학공동연구센터는 인지지능기술, 전력제어기술, 첨단 무선, 영상통신 기술 등 삼성테크윈의 미래 사업인 차세대 지능형 로봇과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핵심이 될 첨단 기술들을 연구하고 있다.
삼성테크윈은 또 산학공동연구센터의 활성화를 위해 연구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산학 장학생 제도를 실시하고 교수 초빙 세미나, 기술교류 컨퍼런스 등을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연구센터 간의 정보 교환과 시너지 효과 창출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삼성테크윈 관계자는 "앞으로도 산학협력체제를 확대하기 위해 산학공동연구센터를 추가로 개소하고 지원과 혜택을 늘려 산학협력의 시너지 효과를 실질적인 사업 성과로 창출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삼성테크윈 저력 바탕은 기능인재
"기업 경쟁력은 현장 기능인력으로부터 나온다."
국내 대표 정밀기계 업체인 삼성테크윈의 인재경영 방침이다.
삼성테크윈이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밀기계산업분야에서 30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개발 성과를 제품으로 구현하는 숙련된 기능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이에 삼성테크윈은 기능인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고자 기능인력의 교육체계 수립과 교육과정 개발 및 사내강사 양성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전사 인재개발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전문 분야에 맞도록 해당 부서에 배치하고, 기술 및 어학능력 향상 등 자기계발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기능장, 품질 명장으로의 성장을 돕고 있다.
아울러 국제기능올림픽 출전에 대비,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과 지원 활동도 병행한다. 전국기능경기대회 입상자 등 우수 인재들의 채용을 점차 확대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기능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에 대비한 체계적인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것.
특히 2007년에는 경남 창원 지식정보연수소에 '삼성테크윈 기능훈련센터'를 설립하고 국제기능올림픽에 대비한 종목별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 같은 적극적인 지원은 2009년 캘거리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몰드메이킹과 CNC선반 분야 금메달 수상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삼성테크윈 관계자는 "내년부터는 창원의 폴리텍대와 협조해 기능 인력 육성 체계를 보다 확대할 예정"이라며 "이를 통해'초일류 정밀제어솔루션 기업 구현'이라는 비전을 달성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광주=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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