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어울린다'는 추임새도 차츰 힘이 빠진다. 여성 매장 한쪽의 푹신한 소파는 가시방석이다. 그녀는 벌써 몇 시간째 고르고 또 고르고, 입고 또 입어본다. 부글부글 끓는 열불을 미소로 감추지만 어기적거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백 바퀴를 돌아야 헤어날 수 있다는 백화점은 숫제 남자들의 무덤. 비상구는 정녕 없단 말인가?" (쇼핑 동행 남성의 독백)
소리 없는 아우성은 상술에 묻히기 일쑤. 쌈지공간이라도 좌판을 열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직성이 풀리는 백화점이 쇼핑의 방관자인 남성에게 관대할 리 없다. 그런데 최근 배려의 흔적이 묻어난다. 새로 짓거나 새 단장을 하는 백화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남성공간이다.
그러나 꼼수는 사뭇 장삿속의 귀재답다. 속내는 여성을 위한 배려이기 때문. 여성들이 거치적거리는 쇼핑의 최대 적(敵) 남성들을 주차장에 차를 파킹(parking)하듯 주차하고, 자유롭게 여유롭게 쇼핑을 즐기라는 의미다.
바로 '인간주차장' 개념이다. '쇼핑 과학자'라 불리는 파코 언더힐이 저서 <몰링의 유혹> (2008년 출간)에서 설파했다. 쇼핑만 오면 엄마 잃어버린 아이처럼 우왕좌왕하는 남편(혹은 연인)을 아예 인간주차장이라 이름 지은 공간에 묶어두라는 것이다. 발바닥 땀나는 남성은 쉴 수 있고, 갈길 바쁜 여성은 눈치안보고 쇼핑을 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1석2조인 셈. 몰링의>
선진 유통기법에 목마른 국내 백화점도 인간주차장을 하나 둘 설치하고 있다. 9월 다시 문을 연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점엔 '맨즈 라운지'(MEN'S LOUNGE)가 있다. 테이블 2개와 소파, TV,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 2대가 놓여 있는 남성전용 휴게공간이다. 쇼핑의 방관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다.
면적은 27.8㎡(8평)에 불과하지만 백화점입장에선 무시할 수 없는 크기다. 그 공간에 점포를 냈다면 연 매출 12억원 정도(신사복 평균 매출)를 올릴 수 있기 때문. 6월 리뉴얼한 신세계 강남점의 '카페5'(39.7㎡)와 '아이팟 매장'도 비슷한 공간이다. 카페5의 연 매출이 3억 정도니 신사복 매장을 냈다고 가정하면 매년 9억원을 놓치는 셈. 매장 곳곳에 마련된 소파 공간(브릿지룸) 역시 남성을 위한 간이 주차장이다.
현대백화점 신촌점 남성 층엔 다트, 미니당구대, 미니사커, 게임기 등을 갖춘 오락실이 있다. 함께 온 여성에게 쇼핑을 빨리 끝내라고 채근하지 말고 무료한 시간을 오락과 함께 달래라는 뜻이다. 현대 목동점은 7월부터 전문 스타일리스트가 남자들에게 '쇼핑개인교습'을 해주는 코디바를 운영하고 있다. 주차만 하지 말고 드라이브도 즐기라는 권유다.
롯데백화점은 남성과 아이들을 한데 묶어 주차시키고 있다. 여성 쇼핑객에겐 보채는 아이들도 잠시 떼놓고 싶은 존재. 롯데 본점의 '키즈카페'는 8월 새 단장을 하면서 아이를 맡기는 방식에서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바꿨다. 의자와 신문 몇 부만 갖다 놓았는데도 쇼핑에서 벗어나니 아빠는 좋다. 갤러리아 수원점도 유아휴게실에 시청각실을 신설해 아빠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롯데 미아점과 잠실점의 쉼터는 이용객의 7할이 남성일만큼 인간주차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김군선 신세계 영등포점장은 "과거엔 쇼핑공간을 늘리는 데만 초점을 맞췄지만 최근 백화점이 대형화하고 쇼핑시간이 길어지면서 남성을 위한 공간을 늘리는 추세"라며 "미국 등 유통 선진국은 이미 '인간주차장'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남성입장에서 상책은 뭐니뭐니해도 쇼핑을 슬쩍 안 따라가는 것일 게다. 그게 쉽지 않다면 인간주차장이라도 이용할 밖에.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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