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이다. 경북 안동시를 취재하다 도산면 가송리의 농암종택을 들렀다. 농암의 17대 종손인 이성원씨와 차 한잔을 나누었다. 종손이 기자와 이름이 같다는 인연에다 농암종택의 아름다움에 대한 중독증까지 더해져 일부러 여러 번 찾아들던 곳이다. 이씨에게 종택 건너편 산자락에 사시던 외딴집 어른들 이야기를 물었더니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진작에 찾아가 볼 것을 아쉬워하자 이씨는 청량산에도 그런 마을이 있고 노인들이 사는 몇 집이 남아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 곱고 아름다운 청량산에 오지의 풍취 그대로 간직한 마을이 있다니 귀가 번쩍 뜨였다. 그 곳의 이름은 두들마을이라 했다.
그는 단풍이 들면 마을이 한층 더 아름다울 터이니 때 맞춰 찾아오라 했다. 그리고 날이 차가워지기만 기다렸다. 설악산 오대산에 단풍이 짙어졌다는 소식이 들릴 때도 오직 청량산으로만 온 신경이 쓰였다.
드디어 종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청량산에 곱게 단풍이 내려앉기 시작했다고. 좀 더 지나 너무 짙붉어지면 단풍의 빛이 지저분해지니 수더분한 지금 어서 오라고.
하늘 아래 첫 동네 두들마을 새미터
이씨가 직접 길을 안내했다. 청량산도립공원 입구를 지나 얼마 안가 첫 번째 청량산 등산로 입구에 주차했다. 산길은 포장됐지만 차로 오르기엔 경사가 급했다. 청량산의 맑은 가을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걸어 올랐다.
밤톨만한 감들이 주렁주렁 열린 땡감나무를 지나고, 이파리가 단단하게 생긴 토종 뽕나무도 스쳤다. 은행 같은 열매를 매단 고염나무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길섶의 잎들은 여전히 푸르렀다. 손으로 만져 보니 많이 말라 서걱거린다. 이제 이 마른 이파리에도 가을이 물들 것이다.
휘휘 도는 산길을 타고 30분을 올랐을까. '하늘다리 1.5km' 이정표 있는 곳에서 이번엔 돌계단으로 길을 바꿨다. 계단을 오르느라 숨이 차기 시작할 즈음 두런두런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허름한 농가 몇 채 몰려 있는 이 곳은 '새미터', 혹은 '물둠벙'이라 불리는 곳이다. 샘 밑의 동네란 뜻이다. 이 마을 바로 아래에 있는 또 다른 촌락과 함께 묶여 두들마을로 불리고 있다. 포장길이 연결된 아랫마을과 달리 새미터는 여전히 지게 등짐이 아니고는 물건을 나를 수 없다. 이씨는 "아래 두들마을은 이곳 새미터에 비하면 도회지"라고 했다.
새미터엔 지금 두 가구만 살고 있다. 동네 어귀 첫 번째 집에서 김장수(78)씨 내외를 만났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가을볕을 해바라기하고 있던 김씨는 청량산에 들어온 지 50년이 넘었다고 했다. 청량정사에서 한 20년 머물다 지금의 새미터에 둥지 튼 지 30년이 지났다. 육 남매 자식들은 다 이곳에서 성장한 뒤 대처로 나가 자리를 잡았다.
세 칸짜리 김씨의 집 처마엔 내년에 심을 마른 옥수수가 매달려 있고, 마당 한쪽엔 겨울을 날 땔감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뒷샘에서 연결된 호수로 부엌에 물이 졸졸 흐르는 것을 빼곤 기름칠해 닦아 놓은 커다란 가마솥과 그을음 가득한 아궁이, 불씨를 담는 화로 등 민속촌에서 보는 우리의 옛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왜 내려가서 편히 살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아직 살만하다"며 씩 웃는다. 김씨의 부인 정경례(77)씨가 말을 이었다. "자식들도 이젠 고집 그만 부리고 내려오라 하지만 공기 좋고 복장(속) 편한 이 곳을 떠나긴 싫네요."
가파른 벼랑에 땀으로 일군 터전
집들을 지나 산비탈로 나서니 김씨 부부와 이웃 심씨 부부가 가꾸는 밭들이 나타났다. 족히 40도는 더 돼 보이는 경사진 비탈에 고추 배추 들깨 등을 심은 조그마한 밭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어떤 밭은 채 한 평도 되지 않는 크기다. 가파른 벼랑의 밭들은 마치 설치미술을 보는 듯하다. 청량산은 돌산이다. 그 척박한 돌밭을 일궈 만든 조각 밭들이다.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다. 발끝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버틸 수 있다. 두들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청량산과 깊게 교감하고 하나가 돼 세월을 버텨 왔다.
밭두렁 여기저기 대추나무가 서 있고, 그 가지에는 길게 매달린 냄비 뚜껑이나 양푼이 바람에 흔들리며 쇳소리를 내고 있다. 산짐승이나 날짐승을 쫓기 위해 내건 것이리라. 새미터 어르신들 외롭지 말라고 찌그러진 뚜껑이 바람과 희롱을 해 대고 있다.
밭은 계속 이어졌다. 얼마나 더 펼쳐졌을까 따라 가보니 청량산 육육봉이 눈 앞에 펼쳐졌다. 노랗고 하얀 들국화와 빨갛게 물든 이파리 너머로 이제 수줍은 단풍이 내려앉기 시작한 기암 봉우리들. 자란봉과 선학봉 사이 하늘다리도 보인다. 선경이 따로 없다. 두들마을 어르신들이 그토록 마을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풍경을 또 어디서 얻는단 말인가.
고추 밭 위의 차조 밭에선 잘 익은 조가 버들잎 모양으로 뭉쳐져 축축 늘어져 있다. 이성원씨는 "이런 차조밭 풍경을 근 20년 만에 보는 것 같다"며 좋아했다. 암갈색 차조 알맹이들이 무리를 지어 석양을 받아 황금색으로 반짝이는데 그 풍경이 은빛 억새보다도 찬란하다. 이 분들 혹 떠나시고 나면 청량산의 차조 밭, 고추 밭 풍경도 사라질 것이다. 가슴에 기록 사진을 남기듯 눈이 아프도록 그 풍경을 새겨 넣었다.
회화나무 긴 그림자 드리운 두들마을
해거름이 짙어질 무렵 아래 두들마을을 향했다. 인기척이 있는 집들은 사람 손길로 반질거렸지만 많은 집들이 폐가로 방치돼 있다. 어떤 집은 지붕이 땅바닥을 덮도록 폭삭 주저앉았다.
산비탈에 어울리지 않는 너른 마당이 있는 집에는 커다란 회화나무 한 그루 마을의 랜드마크 마냥 우뚝 솟아 있다. 마당 넓은 집에는 청량사와의 인연으로 이 마을에 찾아든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청량산은 그렇게 작은 마을을 품에 안았고, 마을은 청량산의 인연을 편안히 감싸 안고 있다.
햇덩이가 이제 막 서편 산봉우리를 넘어가려고 했다. 회화나무는 새미터를 지나 청량산 육육봉을 향해 길고 검은 그림자를 뻗어 올렸다.
봉화= 글ㆍ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 왁자지껄 아이들 뛰놀던 그 시절, 이젠 추억으로만…
두들마을을 찾기 전 이성원씨는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청량산문화연구회에서 내는 <청량(淸凉)지> 2007년 3호였다. 두들마을에 대한 특집호로 마을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청량(淸凉)지>
책 속에서 두들마을이 고향이고 지금은 경기 부천시청에 근무한다는 한 분은 “이삼백 년은 족히 되었을 텅 빈 동네를 홀로 지키고 있는 회화나무, 단오가 되면 어김없이 굵은 그네가 메어졌다. 동네 장정들이 볏짚을 꼬아 그네를 만드는 모습부터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온 동네가 쪽빛 천궁 냄새로 가득한 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야말로 축제가 따로 없었다”고 추억했다.
대구사과연구소에 근무하는 이 마을 출신의 다른 한 분은 “1988년 서울올림픽 덕분에 마을에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태고적 모습을 간직한 채 살았다. 그곳에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두들마을에선 모든 것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서 날라야만 했다.
바퀴가 달린 문명의 혜택은 어디서도 누릴 수 없었다… 산비탈이 평지보다 오히려 편안했던 아이들에게 공은 사치품이었다. 어쩌다 생긴 바람 빠진 공이라 할지라도 마당 둑으로 떨어져 버리면 비탈진 밭을 굴러 내려가면서 가속도가 붙어 더 멀리 튕겨져선 계곡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이들은 눈 앞에서 사라지는 공을 속절없이 보고 있어야만 했다”고 적고 있다.
두들마을도 50년대 후반에는 의상봉 바로 밑에까지 농사를 짓고 한나절 거리에 나무를 하러 갈 만큼 많은 가구가 살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10리 떨어진 재산의 북곡초등학교가 가장 가까웠고,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대부분 봉화군나 영주시 안동시로 조기 유학을 떠났다.
마을은 일년 중 딱 지금이 가장 풍성했다. 당시 마을의 주 수입은 대추였다. 대추를 걷을 삯일꾼을 사서 쓸 정도였다. 여기 대추 한 가마니면 쌀 세 가마니 금을 받던 시절이었다. 주민들은 대추를 지고 매호장이나 재산장에 가서 팔았다. 대추 덕분에 두들마을 사람들은 빚내서 자식 교육을 시키진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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