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이상을 헤맸다. 분명히 마을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올라간 주름진 산 능선 안쪽에는 울긋불긋한 단풍만 비단처럼 화려하다. "저쪽 비탈에 보이는 비닐하우스 뒷길을 따라 가면 임수동인데 이제 그 마을은 없어." 산속에서 간벌 작업을 하던 노인은 방이리에 가면 임수동에서 내려온 두 가구가 살고 있다고 알려 준다.
임수동에 마을은 없었다. 집집마다 마당 가득히 쌓인 담배 잎이 말라가고 잘 익은 홍시가 떨어져 검은 돌 길을 붉게 물들이던 산골마을은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됐다.
"날 잡아서 자~알 왔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오솔길을 따라 산에 오르자 비탈진 밭에서 고추를 따던 노인이 반갑게 맞이한다. 이윤심(72) 할머니다. 임수동을 처음 찾았던 1987년 가을 서울에서 온 기자를 맞이하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겹쳐진다. 함께 있던 이씨의 딸 박순분(47)씨는 어릴 적 뛰어 놀던 동네 터가 이제는 모두 밭으로 변했다며 거든다.
여덟 가구 사십여 명이 모여 살던 임수동 마을이 없어 진 것은 십 오륙 년 전의 일이다. 해발 600m에 자리잡은 산골에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길 조차 없어 점점 살기가 어려워 지자 한 집 두 집 아랫마을이나 타지로 떠나갔다고 한다. 사람들이 완전히 떠난 동네는 다시 산으로 변했다.
도시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는 박천수(49)씨는 사람이 없어 오히려 호두와 감이 흐드러지게 된 이 곳에서 새로운 경쟁력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삼십 가마씩 수확하던 호두는 인력이 없어 수확량을 절반으로 줄였고 감은 아예 딸 생각조차 못하고 있단다. 박씨의 말대로 '사람과 장비만 있으면 먹고 살 걱정 없는 곳'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걱정거리'가 하나 있다. 재대로 된 길이 없다는 점. 그나마 농산물을 실어 나르는 좁고 험한 비포장 길은 개인 비용으로 닦았다. 여러모로 도시 살림이 녹녹찮은 요즘, 떠나갔던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올 채비를 하고 있다고 전하는 임수동 토박이들은 길만 제대로 닦는다면 소득은 얼마든지 올릴 수 있다고 말한다. 길을 내줄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단다.
"무주 구천동 살기 좋다 해도 식전 나무 등살에 못살겠네,
무주 구천동 떠나 살자 해도 지게 지는 팔자에 못 떠나겠네…."
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산골 사람들의 절절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단한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순박한 사람들마저 모두 떠나고 지금은 그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는 임수동. 마을은 사라졌지만 아이들이 매달려 놀던 감나무에는 올해도 단감이 주렁주렁 탐스럽게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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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순편집위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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