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내전으로 잃어버린 그들 고유의 아름다운 색을 되찾아 주고 싶어요."
한국인 최초로 캄보디아에서 현지 농민들과 함께 천연 염색실과 천을 생산하는 사회적 기업 고엘공동체를 일군 한정민(39) 서윤정(38)씨 부부가 한국을 찾았다. 불과 6년 전만 해도 평범한 직장인과 학생이었던 이들은 지금 캄보디아 농가의 '희망'이 돼 있다.
19일 오후 서울 성동구 행당동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한씨에게 인생 항로를 180도 바꿀 수 있었던 계기를 묻자 "그저 작은 용기를 냈을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작은 용기'가 이들 부부뿐 아니라 캄보디아 농민들의 삶까지도 변화시켰다.
1만원 후원으로 시작한 천연 염색
올 9월 초 캄보디아의 유명한 유적지 앙코르와트 근처에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한 호텔이 문을 열었다. 한씨에게 이곳은 여느 호텔과 다르다.
직원 유니폼과 고객용 가운을 만드는 데 고엘공동체의 제품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호텔 내부 인테리어를 맡은 미국인 디자이너가 고엘공동체의 실과 원단을 높이 평가한 덕분이다.
"호텔에 제품을 공급하면서 6월부터 고엘공동체가 드디어 100% 자립 운영되기 시작했어요. 처음으로 우리가 쓴 만큼 돈을 벌어들인 거죠. 자립 운영이 6개월 정도 지속되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겠죠."
한씨 부부와 15명의 현지인으로 이뤄진 고엘공동체는 그곳에서 나는 천연 재료로 실을 염색해 농민들에게 외상으로 판다. 농민들은 이를 이용해 집집마다 갖고 있는 수공 베틀로 원단을 짠다.
고엘공동체는 이렇게 만들어진 원단을 1m에 1.25달러를 주고 사다가 캄보디아공정무역협회(AAC)를 통해 미국이나 유럽의 바이어들에게 판다. 여기서 얻은 이익으로 고엘공동체는 실이나 염색용 물품을 구입하고, 참여한 농가에 의료비와 교육비를 지원한다.
고엘공동체가 지금의 궤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갈 듯하다. 초기에 정기적으로 받는 후원은 아는 선배가 보내오는 1만원이 다였다.
"많을 땐 우리와 일하는 농가가 89가구까지도 됐지만 점점 사정이 나빠져 5월엔 달랑 3가구만 남았어요. 새 실을 살 돈도 없고, 팔아야 할 천은 쌓여만 가고…. 결국 제품 운반에 꼭 필요한 차까지 팔았어요. 호텔 납품이 아니었으면 다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한씨가 일하는 곳은 수도 프놈펜 외곽의 트나옷마을. 한국 행정구역으로 치면 면 정도 규모란다. 2006년 6월 처음 천연 염색을 시작하자 일자리가 없어 고민하던 지역 농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캄보디아 국민의 85%가 농민이지만 농사는 3개월이면 모든 일정이 끝난다. 나머지 9개월 동안엔 그냥 놀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다 못한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지만 거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농촌에선 태어나는 아기 10명 가운데 1명이 1년이 채 안 돼 세상을 떠나요. 사망 원인의 70%가 물이래요. 진흙으로 만든 10달러짜리 정수기가 없어 더러운 물을 그냥 마실 수밖에 없으니까요. 정수기 한 대만 있어도 한 가정이 지출하는 의료비 대부분이 절약되죠. 결국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건 정치도, 종교도 아닌 약간의 생활비에요. 다행히 고엘공동체에 참여한 50~60가구는 기본적 생계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제력을 회복했어요."
부인과의 운명적 만남
캄보디아로 떠나오기 전 한씨는 직장에서 해외 영업을 담당했다. 또래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도 한편으론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용기를 냈어요. 직장이라는 틀을 일단 벗어나고 봐야겠다고 말이죠. 2003년 멀쩡한 직장을 그만뒀을 땐 주변에서 모두 '미친 짓'이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배신감 느낀다'고까지 하셨죠. 하지만 그때 그 작은 용기가 결국 인생을 이만큼 바꿀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시 예전처럼 쳇바퀴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라면 이젠 못할 것 같네요."
퇴사한 이듬해 한씨는 그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에 이끌려 캄보디아로 떠났다. 워낙 가난한 나라니 도움이 될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운명'을 만났다.
"그 친구도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캄보디아에 왔던 거에요. 한국에서 대학원(그래픽 디자인 전공)을 졸업하고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 다른 삶을 살아야 할지 갈림길에 서 있었죠. 그냥 한눈에 끌렸던 것 같아요."
며칠 뒤 한국으로 돌아간 '그 친구' 서씨와 메일을 주고받던 한씨는 2개월 뒤 서울로 날아가 바로 이 커피전문점에서 다시 만났다. 뜻이 통하니 길은 일사천리로 열렸다. 그해 11월 결혼식을 올리고 12월 함께 캄보디아로 떠났다.
"솔직히 처음엔 많이 싸웠죠. 다른 기댈 곳이 없으니 서로 상대방이 좀더 자신의 짐을 덜어 줬으면 하고 바랬던 것 같아요. 이런저런 일들에 손대며 실패도 많이 했었거든요. 해야 할 일이 천연 염색이라는 결론을 얻는 데 꼬박 2년이 걸렸어요."
사실 천연 염색은 캄보디아 고유의 전통 기술이다. 과거 농가에선 집집마다 수공 베틀이 있어 손으로 직접 원단을 만들어 팔았다. 덕분에 다양한 옷감과 색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내전을 겪다 보니 이런 전통의 맥이 거의 끊어졌다. 천연 염색과 수공 베틀은 편리함과 대량생산을 내세운 화학약품 염색과 기계식 직조에 자리를 빼앗겼다. 무장 단체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장악한 5년 동안엔 심지어 검은색 옷만 입도록 강요당했다.
1997년 내전이 종식됐지만 이미 외래 기술이 장악한 시장에서 전통 기술은 쉽게 부활하지 못했다. 또 하수처리 시설이 없는 염색 공장에서 폐수가 그대로 흘러나와 농촌의 땅을 오염시켰다. 농업은 물론, 농민들의 생명도 위협받을 상황에 처한 것이다.
부부는 2006년 3월 잠시 캄보디아를 떠나 전남 화순군에서 염색 전문가인 토벽 정옥기씨에게 6일 밤낮으로 천연 염색 기술을 배웠다. 기본 기술을 익힌 건 그 6일이 다였다. 나머지 기술은 현지에서 직접 개발하면서 상황에 맞게 적용시켜야 했다.
"아내가 캄보디아에서 나는 200여 가지 자생식물과 전통 약재를 구해다 실에 일일이 염색해 가며 가장 아름다운 천연색을 30가지 넘게 찾아냈어요. 염색 재료마다 색깔은 물론이고 실에 안착되는 정도도 천차만별이거든요."
천연 염색을 시작한 지 1년 남짓 된 2007년 7월 부부는 소중한 생명을 얻었다. 딸 사랑이다. 아이의 교육 계획에 대해 물었더니 한씨는 "4, 5년 후의 일까지 벌써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겠냐"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조종사 돼 오지 사람들 돕고 싶어요"
부부의 이번 한국 방문은 약 2년 반 만이다. 한국 오는 비행기 표를 사려면 현지에서 6개월 넘게 돈을 모아야 한다. 어렵게 왔다. 하지만 다행히 약간의 수확을 얻어갈 수 있게 됐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사회적 기업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지만 한씨처럼 외국에 터를 잡고 현지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은 드물다. 캄보디아에서도 후원자를 연결하거나 재정 지원을 하는 외국인이나 외국 단체는 꽤 있지만 직접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일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는 게 한씨의 설명이다.
이런 사실이 국내에도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몇몇 기업에서 관심을 보였다. 재료를 보낼 테니 실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도 들어왔다. 수출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20일엔 사회적 기업가들의 모임에 초청받아 그동안 일궈낸 고엘공동체의 사례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제 돌아가면 현지 농민들이 스스로 고엘공동체를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줄 생각이에요. 염색 파트는 물론이고 디자인이나 해외 바이어 발굴도 그들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게 돼야 경쟁력이 생길 테니까요. 한국 기업과도 연결해 줄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죠. 그런 다음 우리 부부는 물러나려고 해요."
이미 한씨는 고엘공동체 이후의 삶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 그의 원래 꿈은 항공기 조종사다. 상업용 항공기를 조종하려면 계기비행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한씨는 외환 위기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마치지 못한 탓에 그 전 단계 자격증을 따는 데 그쳤다. 다시 공부해서 정식으로 항공기 조종사가 되고 싶단다.
"직접 비행기를 몰면 육로로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까지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하는 곳으로 찾아가서 고엘공동체 같은 활동을 계속하고 싶어요."
마흔쯤 되면 대개 새로운 의미를 찾는 도전적 삶보다는 현재 테두리에서 안주하는 안정적 삶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한씨는 "한국인들이 좀 더 '청년 같이' 살면 좋겠다"고 말한다.
"의미 있는 것을 위해 힘쓰고 고민하는 사람이 청년이죠. 나이에 관계 없이요. 그런 생각이 사라지면 이미 청년이 아닌 거에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드는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새로운 인생을 살길 바랍니다."
고엘공동체의 고엘은 히브리어로 친족이나 친척을 뜻하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일을 마치 가족처럼 마음으로 돕는 인생을 살겠다는 한씨 부부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사진=김주영기자 will@hk.co.kr
■ 천연 염료로 수공 베틀 작업… 그래야 더 많은 일손 고용
고엘공동체는 천이 아니라 실을 염색한다. 이미 직조된 천을 염색하는 후염(後染)과 달리 실 상태에서 먼저 염색한 다음, 직물을 만드는 방식을 선염(先染)이라고 부른다.
물에 자생식물이나 전통 약재를 넣고 우려내 추출한 염료를 발효시킨다. 1주일 뒤 이 물을 끓여 실을 넣고 5시간 정도 색이 골고루 배도록 잘 뒤적이면 염색이 완성된다.
선염은 후염에 비해 염료가 깊숙이 침투하고 고르게 퍼진다. 세탁한 뒤에도 물이 덜 빠지고 얼룩도 덜 생긴다. 오래 사용해도 색이 잘 바래지 않는다. 이런 장점 때문에 버버리 닥스 아쿠아스큐텀 같은 유명 브랜드에서도 최근 선염 직물을 선호하는 추세다.
고엘공동체는 화학 염료보다 입자가 고운 천연 염료를 쓴다. 선염 자체의 장점에 천연 염색의 특징까지 더해져 고엘공동체의 실과 원단은 어디서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색을 띤다.
선염의 최대 단점은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그만큼 일할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한씨가 후염이 아닌 선염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넓은 면적의 천을 고르게 염색하려면 인력이 아니라 대규모 공장이 필요하다"며 "캄보디아 지역 경제가 빨리 살아나려면 염색한 실을 나눠 주고 각 가정에서 수공 베틀로 직접 천을 짜는 '스몰 비즈니스'가 현실적으로 더 적합했다"고 설명했다. 트나옷마을과 주변의 농가 6,000가구가 갖고 있는 수공 베틀만 해도 1만대나 된단다.
수공 베틀로 짠 원단은 기계로 직조한 천에 비해 아무래도 조밀도가 불규칙하다. 부부는 "그래서 오히려 통기성이나 땀 흡수성이 더 좋다"며 "여름철 땀에 젖었다 말리기를 3일 내내 반복해도 냄새가 잘 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기계 원단에 비해 가볍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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