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21일 오전 3시30분께. 임신 7주차인 한모(40)씨의 아내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편 한씨는 전날 밤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온 사촌동생을 자수시키기 위해 함께 경찰서에 간 터라 집에는 혼자뿐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고민 끝에 문을 열어주자 경찰관 7~8명이 캠코더를 앞세운 채 사촌동생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들은 이미 범행장소 인근에서 결정적 증거인 칼을 확보했으나, 추가로 혈흔이 묻은 옷을 찾으려고 들이닥친 것이었다. 압수수색 영장도 제시하지 않았다. 임신 초기 안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충격을 받은 한씨의 아내는 이들이 다녀간 뒤 몇 시간 만에 하혈을 시작했고, 결국 낮 12시께 병원에서 유산 판정을 받았다.
한씨는 "사촌동생이 자수해 도망갈 염려가 없었고 이미 결정적 증거를 확보한 상황에서 집 주인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임신부 혼자 있는 집을 압수수색해 태아가 사망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인권위는 지난 7월 당시 경찰의 압수수색이 인권침해 소지가 있었다며 관할 경기경찰청에 해당 경찰관들에 대한 주의조치를 권고했다.
경기경찰청은 23일 이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진정인이 경찰관 방문을 예측할 수 있었고, 증거물을 고의 또는 과실로 오염할 수 있어 사전 통지하지 않았다고 이유를 댔다. 임신부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새벽 3시가 넘은 심야에 경찰관 방문을 예상할 수 있었으리라는 경찰의 주장은 받아들이긴 어렵다. 가택 압수수색 영장도 야간에는 거의 발부되지 않는 관례를 감안할 때, 자수를 유도한 참고인의 집에 심야에 영장도 없이 들이닥친 행위는 수사편의만 고려한 조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의적 책임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찰의 태도는 스스로 인권의식 부재를 인정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선 경찰서의 반인권적 과잉수사를 감독해야 할 경기경찰청이 이를 오히려 눈감아 주는 인상이다.
문준모 사회부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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