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없이도 불을 피우는 세상이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은 여전히 유효하다. 꼬리를 문 남북정상회담 추진설을 청와대는 사실무근 또는 오해라고 극력 부인해왔지만 남북간 물밑접촉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북한의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일행을 '형님'은 아니더라도 우리측의 무게 있는 인사가 최근 싱가포르 등의 제 3국에서 접촉했다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남북 정부 공히 자의든 타의든 정상회담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다는 점도 여기저기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요란한 설과 냄새에 비해서는 비밀접촉의 성과는 별로인 것 같다. 익지 않은 사과라는 청와대 주변의 얘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비밀 접촉 초기 단계에서 접촉 사실이 흘러나오는 것은 남북 양측의 이견이 워낙 큰 탓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진전 별로인 해외 비밀접촉
비밀 접촉을 개시해서 정상회담 개최 합의까지 각각 한 달 정도가 걸렸던 1, 2차 남북정상회담 때는 도중에 보안이 샌 일이 없었다. 이 정부의 미숙함이나 북한의 서두름이 그 원인일 수도 있으나 매듭이 잘 안 풀리다 보니 사과가 충분히 익지 않은 상태에서 노출됐을 가능성이 크다.
안 봐도 비디오라고, 쟁점은 의제와 회담 장소일 것이다. 여기에는 남북 모두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선이 있다. 남측은 이전 정부들과는 달리 핵문제를 정상회담의 주요의제로 다루고 싶어한다. 현인택 통일부장관은 16일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 초청강연에서 "북한은 핵문제를 성실히 다룰 준비를 하고 남북대화에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남측이 정상회담에서 핵 문제를 다룰 것을 고집하면 북측은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맞받아칠 가능성이 높다. 모양과 명분이 아니라 실익과 실효성을 먼저 따질 문제다.
북측은 6ㆍ15와 10ㆍ4선언의 존중 및 이행이 최우선일 것이다. 북측이 두 선언에 부여하는 핵심적 의미는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남측 정부의 인정이다. 남한 보수정부와의 세 번째 정상회담에서도 체제에 대한 확고한 인정을 요구할 게 분명하다.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당국자들이 두 선언을 존중한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지만 의구심을 해소하기에 충분했다고 보기 어렵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사과를 익게 하겠다면 이 문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번에도 북한이 평양에서 회담을 갖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답방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강력히 비판해온 이 대통령 입장에서 평양행은 절대 사절이다. 경호 상의 이유로 제주도가 이전 정부에서부터 거론돼 왔지만 김 위원장의 비행기 기피증을 감안하면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대안으로 금강산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성사만 된다면야 북측이 희망하는 금강산관광 재개 문제도 함께 풀 수 있고, 세계를 향해 평화 이미지를 과시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제재국면 탈피 목적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실용주의적 접근이라는 포장이 가능하다. 장소 문제는 이런 점에서 덜 중요한 쟁점이다.
창조적 발상으로 정체 풀길
그래서 최대 관건은 다시 북핵 문제로 돌아간다. 북미 간에 추진되는 양자접촉에서 6자회담 재개와 북핵 완전 폐기 논의에 진전이 이뤄진다면 얘기는 훨씬 쉬워지는데, 돌아가는 판세가 여의치 않아 보인다. 도리어 남북관계 개선의 때를 놓치지 말라고 충고한 원자바오 중국총리나 김 위원장의 이 대통령 초청설을 흘리는 미국은 남북관계에서 돌파구를 열라고 압박하는 것 같다. 북한과 남한, 미국과 중국 등 문제 해결의 주요 당사자들이 각기 상대방의 결단과 양보를 촉구하며 몰아대는 꼴이다. 그러다 보니 제 꼬리를 물려는 고양이처럼 제 자리를 맴돌고 있다.
북한에 핵 능력 강화의 시간만 벌어줄 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정체의 원형 고리를 끊으려면 적극적 의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창조적 발상이 필요하다. 제 3국의 비밀장소에서 산고를 겪고 있는 제3차 남북정상회담도 이런 의지와 발상이 없으면 매듭이 풀리기 어렵다.
이계성 논설위원ㆍ한반도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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