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갈 때 짐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지만 언제부턴가 꼭 챙기는 물건이 있다. 지난 여름 집을 떠나 머물렀던 소도시의 작은 방에도 나는 내 방에 있던 작은 인형 몇 개를 옮겨놓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잠깐씩 머물다 떠난 썰렁한 방이 그제야 조금은 익숙한 느낌의 방이 되었다. 그래도 내 경우는 나은 편이다.
여행을 갈 때마다 자신이 신는 욕실화를 챙기는 이도 있고 심지어는 자신의 베개를 먼 이국까지 가져온 이도 보았다. 독일의 사진작가 호어스트 바커바르트는 34개국, 15만km의 여행길을 늘 붉은 소파와 함께했다. 소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았다. 고르바초프도 있고 제인 구달도 있다. 홈리스들도 앉고 농사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농부도 앉았다. 이상한 것은 이 붉은 소파 위에서는 그 누구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누구라도 다 멋져 보인다는 것이다.
강렬한 붉은색 때문일까 유명인들도 나중에야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소파는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성숙해져간다. 사진 속에서는 매양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듯 새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제의 그 소파가 아닌 느낌을 준다. 유럽의 낯선 숙소, 낮은 조도 아래의 침대에 놓여 있던 선배의 베개가 떠오른다. 먼 여행길에 피곤한 듯 조금은 지쳐보이던, 솜이 눌린 보라색 꽃무늬 낡은 베개.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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