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음모를 구체화해 갔지만 이에 대한 저항 또한 드세었다. 학생들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인들의 언론민주화투쟁, 지식인들의 대일예속화 반대투쟁, 교수들의 학원자주화운동, 법관들의 사법권독립수호운동 등 박정희 정권의 정보폭압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이 국민 각계에서 터져 나왔다.
더욱이 '전태일 사건'이나 '광주대단지 민란'에서 확인되었듯이 '조국근대화'에서 소외된 민중들의 분노에 찬 투쟁 또한 끊이지 않았다.
그 해 9월15일 월남에서 근무했던 한진 노동자 400여명이 체불임금의 지급을 요구하며 서울 한복판의 KAL빌딩에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인천 실미도의 특수부대에서 대북한공작 훈련을 받던 특수부대 요원 24명이 난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부대 기간요원들을 사살한 후 탈취한 버스로 청와대를 향해 진격하다 서울 대방동까지 이르렀으나 버스가 가로수에 받쳐 멈춰 섰는데, 이들 가운데 15명이 수류탄으로 자폭하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전쟁이 난 듯한 상황이었다.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1ㆍ21사태'에 보복하기 위한 훈련이었다는데, 그 비인간성은 몇 년 전 '실미도'라는 영화로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박 정권의 한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러니 우리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도 정당성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래서 박정희 정권을 퇴진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박정희 정권을 물리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1학기 때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학생들이 정당한 요구를 내걸고 집회와 시위를 해도 휴업령(휴교령)을 내리면 속수무책이었다.
제적이나 구속으로 투쟁이 약화되지는 않았으나 휴교령을 내리면 투쟁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휴교령에 대비해 개학하자마자 한일문제 강연회나, 부정부패규탄 성토대회 등을 열어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의지를 높였다. 서울법대에서는 이병린, 김준보, 유인호, 이영희 선생을 모시고 시국대강연회를 개최해 투쟁의 방향을 제시함과 더불어 투쟁의지를 다졌다.
우리는 또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개편하면서 연세대의 '민권쟁취단'을 병합해 그 명칭을 '전국학생연맹'(전학련)으로 바꿨다. 민주주의가 실종된 마당에 '민주수호'란 말은 적합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대의 김영일, 연세대의 김건만, 서울대의 최명의, 성균관대의 이준형을 대표로 선출했는데, 그 뒤 박정권의 탄압 때문에 전학련의 대표는 자주 바뀌어 2학기 때에는 서울대의 손예철, 외국어대의 선경식이 대표를 맡기도 했다.
9월7일 전학련 명의로 '민주ㆍ민족ㆍ통일의 깃발을 높이 들자'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그 당시에는 '시국백서'로 불리었다. 이 선언문을 통해 우리는 '참된 의미의 민족주체세력'을 형성할 것을 밝혔는데, 이것은 우리들의 중요한 문제의식이었다.
이 문건이 나오기까지 조영래와 이신범, 심재권 등 학생운동 선배세대들은 많은 고민과 논의를 했는데, 사회를 변혁하려면 사회변혁의 주체세력을 형성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논의에 바탕해 조영래가 이 문건을 작성했는데, 학생운동의 방향과 과제를 정확히 제시한 데다 그 표현이 적확한 명문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사법파동'과 관련해 조영래와 나는 견해가 달랐다. 서울형사지법 이범렬 판사가 제주도에 증거조사를 하러 갔다가 피고인의 가족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다 하여 검찰이 이 판사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 판사들이 이에 항의해 집단사표를 내면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사퇴를 요구한 사건이다.
조영래는 판사들의 집단행동은 사법부 독립을 위한 것인 만큼 학생들이 이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나는 그럴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범렬 판사가 피고인의 가족으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것이 사실인 한 검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학생들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여튼 학생들은 교련반대시위, 시국강연회, 부정부패규탄대회 등으로 반정부투쟁을 벌였는데, 10월5일 수도경비사 소속 무장군인들의 고려대 도서관 습격 사건이 본격적인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국에서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이 일어나자 박 정권은 10월15일 '학원질서확립을 위한 특명 9개항' 발표와 더불어 위수령을 발동해 전국의 주요대학에 휴업령을 내리고 군대를 투입했다.
23개 대학에서 데모 주동학생 177명을 제명하고, 74개의 학생단체에 대한 해산명령과 '자유의 종'을 비롯한 '지하신문' 14종에 대한 폐간명령도 내렸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이신범, 심재권, 조영래를 소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하고, 나머지 주요 학생운동가 100여명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다. 이로써 민주화투쟁이 초토화되었고 몇 년간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이로써 민주세력이 소탕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을 한꺼번에 강제로 군에 입대시킴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깊은 동지의식을 가지고 7,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중추가 되도록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때의 학생운동은 정말 순수했다. 1971년도에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71동지회'를 만들어 오래도록 그 때의 순수한 뜻과 열정을 살려가는 것은 그 때의 순수한 뜻과 열정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음모에 대한 국민 각계의 저항도 드세었고, 박 정권의 통치능력 또한 한계에 이르러 가히 무정부상태를 방불케 했는데도, 왜 민주화를 달성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다음 회에서 밝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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