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타임 1시간21분의 필름 속에는 19만2,720시간의 세월이 담겼다. 필름 속 첫 주인공이었던 할머니는 그 사이 운명을 달리했고, 13세 소년은 배가 나온 35세의 가장이 돼 마지막 주인공이 됐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영화 얘기가 아니다. 한 철거민 가족의 4세대에 걸친, 고단했던 22년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리얼리티의 경이로움이 느껴지는 '사당동 더하기 22'는 그래서 그 자체로 '역사'다.
이를 만든 감독이 조은(63)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다. 21일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동국대 교수회관 조 교수의 연구실은 책과 비디오테이프, 슬라이드 필름, 녹취 테이프, 촬영용 카메라 등이 뒤섞여 있었다.
교수 겸 다큐 감독의 작업실인 셈. 올해 4월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처음 출품돼 모습을 드러낸 '사당동 더하기 22'는, 제작 기간의 상식적 한계선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단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22일 오후 6시 동국대 중강당에서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무료 상영회도 갖는다.
희끗희끗 흰머리가 비치는 60대 사회학자가 이 작업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6년, 그의 나이 마흔 때였다. 조 교수는 당시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한창 철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던 관악구 사당동에 카메라와 녹음 테이프를 메고 들어갔다.
2년여간 진행된 현장 조사는 재개발이 아동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당시 인상 깊게 만났던 가족이 정금선 할머니(당시 64세)를 비롯해 건설 막노동을 하는 아들, 씨름 선수인 큰 손자 영주(13), 손녀 은주(10), 작은 손자 덕주(7)였다.
정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열 여덟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간 뒤 한국전쟁 당시 함경도에서 월남해 미군부대 앞에서 장사는 물론 포주까지 하며 부산 등을 전전하다 사당동으로 흘러왔다.
조 교수는 "할머니의 굴곡진 삶은 전형적인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면모를 보여준다"며 "하지만 할머니는 주눅들지 않고 솔직하고 질펀하게 세상에 대해 얘기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5년 뒤인 1991년 조 교수는 불현듯 "정 할머니네가 지금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당동에서 쫓겨난 뒤 10평 남짓한 노원구 상계동의 영구임대아파트로 옮긴 정 할머니 가족과 다시 만났다.
정 할머니와 교류를 지속했던 조 교수는 1998년부터 사진기 대신 동영상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본격적인 다큐멘터리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할머니 가족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빈민 재생산 구조를 연구해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회학과 대학원생들과 함께 촬영에 나선 조 교수는 수시로 할머니 댁을 찾았다. 한 달에 한 두 번은 꼭 시간을 내서 찾았고 명절이나 할머니 증손녀가 태어난 날 등 특별한 날도 놓치지 않았다.
그 사이 정 할머니 가족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열 살이었던 은주는 고등학생이 되어 한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는데, 스무 살 때 딸도 낳았다. 가난은 계속해서 대물림됐다. "애를 유산하려고 했는데 돈 몇 십만 원이 없으니까 한 달 두 달 기다리다가 애가 커졌지. 돈만 있으면 낳지 않았지." 손녀의 삶에 혀를 차는 정 할머니의 혼잣말도 조 교수의 카메라에 담겼다.
중국 옌볜 출신의 며느리는 1년 만에 집을 나갔고 학업에 뜻이 없었던 덕주는 경찰서를 들락날락했다. 2007년에는 다큐 속 주인공이었던 정 할머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조 교수는 제자들과 함께 할머니 상가를 지켰고 화장터도 함께 따라 갔다.
그러나 절망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노총각 영주씨가 2007년 필리핀 여성 지지와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려 아이까지 얻었다. '사당동 더하기 22'는 엄마가 갓 태어난 아이에게 "안녕"이라고 첫 인사하는 모습으로 마무리 돼 미래의 희망을 열어놓았다. 조 교수는 "필리핀 어머니가 자신의 모국어를 놔두고 한국말로 인사하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마지막에 넣었다"고 말했다.
22년간 정 할머니 가족 삶을 추적한 조 교수는 "안정적인 거주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한 빈곤은 대물림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용산참사에서도 철거민들이 주거 문제를 제기했듯이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교수는 연구자로서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철거 재개발 문제점을 많이 알수록 주민들 입장에서 항의도 하고 정책 제언도 하고 싶었지만, 연구가 멈출 것 같아서 꾹 참고 계속 연구자로 남았다." 정 할머니가 숨졌을 때의 소감을 묻는 질문에도 그는 "연구자로서 코멘트 하기 어렵다"며 관찰 대상과 철저한 거리두기를 유지했다.
사회학자인 조 교수가 펜 대신 카메라를 든 이유는 무엇일까. "학생들에게 철거민과 빈곤 재생산 문제를 아무리 설명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2001년 30분 분량의 영상물로 제작해 보여주니까 한 번에 이해하더라."
'사당동 더하기 22'를 상영하겠다는 일반 극장의 요청은 아직 없다. 일반인이 관람하기에 리얼리티의 무게감이 너무 크기 때문일지 모른다. 조 교수는 "기회가 있다면 일반인들도 이 작품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민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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