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문이 지나치게 서양 학문에 지배되고 있다는 지적은 수 십 년 동안 수없이 나왔다. 하지만 아직 실제로 이렇다 할 반성과 성과는 없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한글 사회과학''우리 눈으로 본 세계화와 민족주의''단일사회론'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면 적대감이었다.
대외 의존적 학문 풍토
기성 서양 학문의 패권은 강고하다. 이에 대한 조그만 도전도 시초부터 싹을 잘라버린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적 학문'을 주장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당위론이나 원론에 그칠 뿐 구체적인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학 분야에서 그래도 그런 반성이 많이 나온 편이다. 서양 학문의 패권을 지적하고 서양 중심주의를 넘어서자는 주장들은 세련된 학술 형태로 많이 나왔다. 미국 사회과학이 어떻게 유럽 사회과학을 극복했는지에 대해서도 소개되었다. '자아 준거적'정치학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 한국 정치외교사와 정치사상의 전통을 충분히 연구하거나 고유한 분석틀을 개발해야 한다는 제안도 많이 나왔다. 또 이런 담론은 학계 안팎에서 상당한 공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아직도 한국적 정치학을 하기 위해 실제 애쓰는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의 정치 이론을 벗어난 새로운 개념이나 이론을 창안하는 일은 외로울 뿐 아니라 아주 어렵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도 무시당하거나 폄하되기 일쑤다. 게다가 일반적인 원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 학계의 대외 의존성을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악의에 찬 반격마저 받게 된다.
최근 한국 정치학계의 대표적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했다. 한국적 국제정치학이 부분적으로나마 시도한 업적들을 평가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논문 심사자 한 분이 매우 감정적인 평을 보내왔다. "미국 국제정치학자들의 심오하고 세련된 이론에 필적하는 한국 학자의 이론이 어디 있느냐, 한국적 국제정치학 운운은 헛소리다"라는 요지의 주장이었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위스키가 소주보다 우수한 술이니 소주는 마시지 말고 위스키만 마시자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 자생적 학문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는 그 심사자는 물론이고 이런 분에게 심사평을 맡기는 학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새로운 학문적 시도에 기성학계가 이렇게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미국적 학문, 자기들 생각으로 보편적인 학문에 대한 도전이고 나아가 자기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이라고까지 생각하기 때문이다.
답답한 노릇이다. 물론 답답하기는 반대쪽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 학문을 위해서는 우리 역사와 전통에 대한 충분한 연구를 (먼저) 해야 한다고만 생각하니, 어느 세월에 그것을 다 하고 그 바탕 위에 새로운 사회과학을 만들 수 있겠는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새로운 개념 창출과 새로운 분석틀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우리 학문의, 근본 접근에 대비되는 '실용적 접근'이다.
한국적 사회과학 고민해야
내가 지금까지 만든 것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한국적 국제정치학 연구의 사례는 모두 미국 정치학과 동떨어진 순수 토종 학문이 아니다. 사회과학에도 학문의 보편성은 있다. 그 것에 '한국성'을 보탬으로써 한국적 사회과학이 만들어진다. 일종의 퓨전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이렇게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한국적 사회과학을 영영 못 만들게 된다. 너무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아예 적대적인 사람들이나 모두 생각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김영명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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