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에 입행한 다음 달인 1961년 5월에 나는 자취생활과 고모님 댁을 전전하던 불안정한 생활을 청산하고 후암동에 있는 한국은행 생활관으로 주거를 이전했다. 쾌적한 환경에 독방을 쓰고 아침, 저녁 식사까지 제공되는 이 곳 생활은 내게는 딴 세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고생하고 있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늘 내 마음에 걸렸다. 가정 정리를 위해 결혼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기준은 내가 어렵게 자라 촌스럽고 개성이 강한 편이어서 이러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어야 하고 고생하신 어머니를 잘 모실 수 있어야 한다는 평범한 것 이었다.
마침 집안 형수님이 친구의 동생을 소개해서 아내를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그러한 기준에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아내 권영하는 이대 국문과 출신으로 익산시에 살고 있었다. 장인어른 권직(1900~1987)은 전주고보 1회 졸업생으로 해방 당시 세무서장을 하다가 6ㆍ25전쟁 전에 그만 두고 양조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나는 이리공고 다닐 때 기차통학을 하면서 6년 동안이나 그 집 문 앞을 오갔었다. 평범한 여자지만 청순하고 꾸밈없고 매사에 두터운 신뢰감을 주는 점이 좋았다.
1963년 5월에 익산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아내는 당분간 농촌에서 어머니와 같이 지냈다. 어머니가 나를 마흔에 낳으시고 평생 고생만 하셨으니 며느리 보기를 얼마나 기다렸겠는가. 새 며느리가 농촌생활에 익숙할 리 없는데 자다 보면 어머니는 며느리 엉덩이를 두들겨주고 밥 먹는 모습도 예쁘고 마루를 퉁탕퉁탕 소리 내며 걸어 다니는 것도 예쁘다고 박수를 쳤다.
아내도 시어머니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믿고 의지 했다. 서울에서 어머니 모시고 22년을 살았는데 어머니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본 일이 없으며 항상 사랑과 정성을 담아 어머니를 모셨다.
그 내림인지 지금 아내는 두 며느리에게 어머니가 자기에게 한 것과 똑 같이 하고 있으며 두 며느리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 어머니는 늘 며느리에게 "너만 앞세우면 무서울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지금 아내가 며느리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시골에 있는 내 형제들과도 시누이 올케의 관계라기보다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지금도 매년 두 세 차례씩은 고향에서 농사하시는 누님과 전주에서 살고 있는 여동생과 함께 고향에 있는 산소에 성묘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점심 대접하고는 3박4일 예정으로 지리산 선운산 등으로 여행을 다니고 있는데 이것도 아내가 이끌어서 하는 일이다.
이렇게 아내는 어머니 잘 모시고 형제들과 우애하고 3녀2남 자녀 잘 낳아 기르고 나의 사회적 성장을 뒷받침하는데 있어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 왔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예나 지금이나 다투는 일이 많은데 그것은 성격의 차이에서다. 나는 아버지를 닮아 이지적이고 냉정한 편인데 아내는 장인을 닮아 다정다감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다. 아내는 매사에 완벽하고 철저한 성품인데 나는 대충 대충하는 농촌사람의 기질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신발을 벗은 맨발로 흔히 현관을 디디는데 그것이 아내에게는 용납되지 않으며, 나는 음식점에서 숟가락을 식탁 위에 바로 놓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내는 반드시 종이를 깔고 놓아야 하며, 나는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일이 많은데 아내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결혼식 주례를 많이 서왔다. 그 때마다 부부간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점, 그 다른 것을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그 조정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방법에 대해 빼놓지 않고 말해왔는데 이것은 나의 경험을 말한 것이었다.
내가 결혼하던 해 가을에 여동생은 전주의 중학교 교사 주동욱과 결혼하였다. 어머니와 오빠에 짐을 덜어 주려고 결혼을 서둘렀던 것이다. 나는 만감이 교차하는 감회 속에서 여동생을 보내면서 깊이 여동생의 행복을 빌었다.
그 뒤 여동생은 남편이 교육계에서 나름대로 성공하고 자녀들도 모두 잘 장성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 여동생이 결혼하고 나서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합숙소 생활을 청산하고 사직동에서 우리 내외와 어머니 세 식구의 살림을 꾸렸다.
1961년의 경제지표를 보면 1인당 국민총생산은 82달러이고 전체 취업자 중 농어업이 65%(2008년 7%)를 차지하는 후진국이었다. 내가 입행한 1961년의 한 달 봉급은 가족수당을 합해 8,270원이었다.
1961년과 2009년 사이 소비자 물가지수는 60배 대학등록금은 약 300배 올랐다. 그 월급이 요즘 돈으로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대략 100~150만 원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월급은 그 당시의 경제형편에 비추어 볼 때는 많은 것이었다. 공무원 봉급의 배가 넘었으며 대기업 월급보다도 약 30% 많았다. 그러나 이 월급으로 세 식구가 사는데 근검절약하고도 저축 한 푼 할 수 없었다.
아내는 계란을 한 개 두 개 낱개로 사왔으며 연탄을 빌려 땐 일도 있었다. 양복은 1년 또는 1년 반의 월부로 해 입었다. 전화는 없었고 텔레비전은 몇 년 후에야 나왔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