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30여명이 살해된 '전남 구례보도연맹 사건'에서 당시 경찰서장의 용기와 노력으로 수백 명이 목숨을 건진 것으로 밝혀졌다.
주인공은 6ㆍ25 전쟁 때 구례서장이었던 고 안종삼(1903~1977)씨.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최근 구례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의 실체를 조사한 진실규명 결정서를 통해 1949년 7월부터 51년 4월까지 구례서장이었던 안씨 덕분에 수백 명이 목숨을 건진 사실을 확인했다.
결정서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구례경찰서는 소집명령을 내려 보도연맹원 수백 명을 경찰서 유치장과 창고 등에 구금했다. 이들 가운데 좌익극렬분자로 '갑종'에 해당되는 30명은 7월14일 담양군 대덕면 문학리 옥천나들 골짜기에서 경찰에 집단 사살됐다.
또 외곡출창소에 갇혀 있던 7, 8명도 열흘 뒤 구례군 토지면 섬진강변 모래사장에서 학살됐다. 나머지 보도연맹원들도 경찰에 의해 살해될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 이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안 서장이 학살을 적극적으로 막은 덕분이었다.
'섬진강변 학살'직후 마을 유지들로부터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간청을 받은 안 서장은 이틀 동안 장고를 거듭한 끝에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하고 퇴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구금된 수백 명을 풀어주는 용단을 내렸다.
당시 구례지역에는 5,000여명의 불순분자가 있었고, 이들 가운데 480명은 좌익 극렬분자로 파악돼 있어 현직 서장이 이들을 석방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모두 방면합니다. 애국의 기회를 줄 테니 나라에 충성하십시오. 이 조치로 내가 반역으로 몰려 죽을지 모르지만, 혹시 죽으면 나의 혼이 480명 각자의 가슴에 들어가 지킬 것이니 새 사람이 돼주십시오."
진실화해위가 결정서에 첨부한 '광복30년사(1975년 전남일보 발행)'에 실린 보도연맹원 석방 당시 안 서장의 비장한 연설이다.
안 서장의 용단에 부하 경찰관들은 "이러다가 (보도연맹원들에게) 우리 가족들이 보복 당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과 불안에 떨며 후퇴했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전세가 뒤집힌 뒤 다시 찾은 구례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도연맹원들의 보복은커녕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도 경찰가족을 포함한 보복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다.
안 서장은 51년 1월 다시 구례로 돌아와 인민군 잔당을 소탕하고 치안 회복에 앞장섰다. 주민들은 그 해 4월 총경으로 승진한 안 서장이 남원 지리산지구경찰전투사령부로 발령 나자 그의 공덕을 담은 10폭짜리 병풍과 시구를 선물했다. 안 서장은 퇴직 후에도 구례에 터를 닦고 살면서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 제2대 전남도의원에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구례 보도연맹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참고인 대부분이 보도연맹원 학살보다는 안 서장에 의해 석방된 사실을 강조했다"며 "전남지역 12곳 보도연맹 사건 중 경찰의 미담사례를 접한 곳은 구례가 유일했다"고 말했다.
구례=안경호 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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