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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5> 송시열은 왜 윤휴를 두려워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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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5> 송시열은 왜 윤휴를 두려워했는가?

입력
2009.10.1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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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1636년(인조 14)에 백호(白湖) 윤휴를 처음으로 만났다. 우암은 30세요, 윤휴는 20세 때였다.

윤휴의 학문적인 명성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를 만나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만난 곳은 충청도 삼산이었다. 우암은 곧바로 친구인 송준길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삼산에 이르러 윤휴와 더불어 사흘간 학문을 토론해 보니 우리의 30년 독서는 참으로 가소롭기 그지없다"는 내용이다. 그 후 우암은 백호에게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우암이 40대에 접어들면서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백호가 주자와 견해를 달리했기 때문이다. 우암은 주자 지상주의자인데 비해 백호는 주자 상대주의자였다.

이에 따라 백호는 종래 주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중용> <대학> <효경> 등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김굉필은 <소학> 을, 조광조는 <근사록> 을, 이황은 <심경> 을, 이이는 4서를, 김장생은 <가례> 를 받들었는데 비해 송시열은 <주자대전> 과 <주자어류> 를 받들었다. 우암은 안질과 각질도 주자가 앓던 병이라고 좋아했고, 약혼한 손녀가 죽은 것도 주자와 같다고 좋아할 정도였다.

"주자의 말 한마디도 격언 아닌 것이 없으며, 말마다 옳고, 행위마다 정당한 이는 바로 주자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백호는 주자의 해석을 그르다 하고, 장구를 멋대로 고쳤다. 심지어 "경전의 깊은 뜻을 어찌 주자만 알고 우리는 모른단 말인가?"하는 말로 주자의 아성에 도전하는 듯한 인상까지 풍겼다.

우암은 백호를 직접 찾아가 설득해 보고, 편지로 달래 보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우암은 격분한 나머지 백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우암에게 사문난적을 몰린 사람은 백호와 서계 박세당 두 사람 뿐이다.

그런데 우암의 불만은 엉뚱한 곳에서 폭발했다. 1653년(효종 4) 황산서원에서 우암이 윤선거 등과 함께 만났다. 이 때 윤선거가 백호를 은근히 두둔하자 우암의 분노가 폭발해 사문난적을 때린 것이다.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가 미칠지라도 윤휴를 배척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윤휴의 손에 죽는다면 더 이상 영광이 없다."

우암의 말이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그 보복은 예론과 당쟁에서 나타났다. 두 사람은 당파도 달랐다. 우암은 노론이고 백호는 남인이었다. 경신환국에 윤휴가 갑산에 유밴된 후 사사되어 먼저 죽고, 기사환국에 입장이 바뀌어 우암이 뒤에 죽었다. 숙종 대의 서남당쟁에서 두 사람이 모두 희생된 것이다.

교조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각각 극단론을 주장하다가 낭패를 한 경우이다. 교조주의와 극단주의를 경계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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