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 '2009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의 개막작으로 초청된 쉬커의 '템페스트'는 SF 무술영화 대가의 연출답게 현란한 무대 어법이 객석을 압도했다. 그러나 그 중핵을 관류하고 있는 것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중국 전통 경극의 미학이었다.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화두로 잡은 무대가 풍성하다. 15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막을 내린 국립창극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악ㆍ가ㆍ무 전통을 이 시대로 바싹 끌어당긴 결과다. 원작에 나오는 두 가문의 대립을 전라도와 경상도 대가집의 갈등으로 치환, 한판 흥겨운 잔치와 비장미 넘치는 비극을 동시에 선사했다. 2톤 분량의 물을 이용, 천장에서 빗줄기처럼 쏟아붓는 '레인 커튼'을 등장시켜 창극이 현대 무대 어법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제시하기도 했다.
극단 연우무대는 전통 예술이 갖는 제의성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길삼봉뎐'을 공연한다. 고유의 표현 어법을 빌어, 임진왜란 직전의 흉흉한 민심 속에서 민초의 각박한 삶을 시청각적으로 재현한다. 아쟁 등 전통 악기에 판소리와 무속 장단을 결부시킨 음률이 자욱한 무대가 힘없는 백성들의 심리를 표현한다. 연출자 안경모씨는 "실체 없이 상대방을 매도하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민초들이 감내하는 고통은 통시대적 진실"이라며 "원작('둥둥곡')이 집어내는 암울한 상황은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성과도 결부되는 것"이라고 무대의 현재적 의미를 밝혔다. 27~31일, 남산예술센터. (02)744-5701
동랑레퍼토리극단은 소설가 최인훈씨가 1976년 희곡으로 발표, 연극과 영화로도 탈바꿈했던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보다 한국적인 어법으로 살려 무대에 올린다. 신화적 세계와 인간성이 물질문명에 의해 소실된 현대사회에 대한 경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유효하다. 정가를 이수, 서울대 등지에서 강의중인 김민정씨가 소리를 지도한 덕택에 무대의 정황은 한판 창극을 연상케 한다. 연출 이기도. 11월 5~15일, 유치진극장(옛 남산드라마센터). (02)3443-8695
극단 미추는 '햄릿' '리어왕' 등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상상력을 빌어 하나로 묶은 무대 '철종 13년의 셰익스피어'를 공연한다. 일본 극작가 오노우에 히사시의 '텐보 12년의 셰익스피어'를 극작가 배삼식씨가 배경을 조선 말기로 옮긴 패러디 코미디다. 톡톡 튀는 대사와 젊은 배우들의 빈틈없는 앙상블이 관건이다. 연출은 일본 여성 연출가 마츠모토 유코가 맡았다. 23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극단 시선은 우리 전통 무용의 정수인 정재(呈才)를 이 시대 연극 무대로 끌어들인 '미롱'으로 색다른 흥취를 선사한다. 춘앵전, 박접무, 검무 등 전통 무용은 물론 남사당패의 가면극과 풍물 등 갖가지 양식이 광대와 기생의 사랑 이야기 속에서 한데 어우러진다. 제목 '미롱(娓弄)'은 춤의 극치에서 짓는 미소를 가리킨다. 홍란주 작ㆍ연출. 25일 우석레파토리극장 (02)744-7981
한편 극단 목화레퍼토리컴퍼니는 셰익스피어를 독특하게 해체ㆍ변용한 '2009 로미오와 줄리엣'(오태석 연출)을 11일 끝내 극단의 일련의 움직임에 큰 획을 그었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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