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형님 집으로 왔으나 부산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 갈 명분을 찾아야 했다. '학생들의 데모가 좀 잠잠해지면 서울로 가라'고 형님이 말했는데, 학생데모는 잠잠해지기는커녕 더 격렬해지고 있어 서울로 가겠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아르바이트 핑계를 댔다. 아르바이트가 핑계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아르바이트 때문에라도 서울로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그 당시 나는 H종묘 댁의 연년생 아들과 딸을 가르쳤는데, 둘 다 중학교 3학년생으로 공부를 아주 잘 해서 가르치기가 편한 터에 학비를 충분히 충당할 수 있을 만큼의 보수를 받아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소아마비를 앓아 목발을 짚고 다니는 아들은 나를 무척 좋아해서 헤어지기가 싫었다. 학생의 어머니도 내가 자기 아들의 친구처럼 말 상대가 되어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생이나 그 가족들과 가까워진 경우가 대단히 많다. 내가 빨갱이 취급을 받는 어마어마한(!)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던들 지금도 대단히 가깝게 지낼 것이다.
30년 가까이 연속적으로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거나 북한을 이롭게 하는 활동을 했다는 등의 이유로 구속이 되거나 수배를 받았으니 그 사람들이 나를 찾아올 수가 없었고, 나 또한 그들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 연락할 수가 없었다. 부모나 형제같이 지낸 사람들인데 소식도 없이 지내게 되니 죄송하기도 하고 또 부끄럽기도 하다.
하여튼 나는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는 이미 박정희 정권을 근본적으로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4ㆍ27 대통령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5ㆍ25 총선의 보이콧을 요구한 것은 민주주의의 실종과 선거의 무용성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는 4ㆍ19 혁명처럼 물리적인 힘으로 박정권을 물러나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4ㆍ27 대통령 선거 뒤의 학생들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은 박정희 정권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당시 우리 학생들은 일본의 재무장을 경계하고 일본의 신군국주의와 신식민주의를 규탄하는 강연회와 토론회를 많이 열었다. 지금은 일본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나아가려 한다는 인상이 거의 없다시피 하나 1970년 대 초반에는 일본이 자위대 개편과 일본 헌법의 개정을 통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나아가려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그래서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려는 사토 일본 총리의 방한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격세시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에 대한 인식도 그 가운데 하나다. 지금도 이시하라 신따로 도쿄 도지사나 고이즈미 전 총리처럼 일본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일본이 2류 국가로 전락하는 데 따른 일본 국민들의 무기력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 일본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계적인 분위기도 '지역연합'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특히 '우애(友愛)사회의 실현'을 정치 목표로 내세운 하토야마 같은 사람이 일본의 총리가 되어 '우애외교'의 기치 아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내놓고 있으니 말이다. 마침 이런 구상은 일본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내놓은 바가 많이 있어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고 기회는 잡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하토야마 총리의 구상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가져오는 동아시아공동체 실현의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특히 그는 '우애는 유약한 개념이 아니라 혁명의 가치를 수반한 전투적 개념'이라고 설파했던데, 공감된다. 사랑의 사회적 실현과 사랑의 개인적 실천은 사회혁명이요 자아혁명이겠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우애의 정치'야말로 내가 오래 전부터 강조해온 '사랑의 정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교련반대투쟁과 4ㆍ27 대통령선거 무효투쟁, 사토 일본 총리의 방한 반대투쟁 등 반정부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는 정치환경도 문제였지만 한영섬유의 김진수씨 피살사건, 신진자동차 노사분규사건 등 민심을 흉흉케 하는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특히 철거민들을 한데 모아놓은 광주 대단지(성남)에서 민란차원의 폭동이 일어나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이고도 반서민적인 정책에 대한 분노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김진수 사건은 기독교단체와 이화여대의 '새얼'팀이 주관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장례식을 치렀는데, 전태일 사건이 있은 뒤라 학생들의 관심과 참여가 상당히 컸다.
무엇보다 광주 대단지의 민란은 혁명전야를 느끼게 했다. 먹을 것이 없어 갓난아기를 어떻게 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그들의 참상이 어떠했겠는가? 나는 사건 직후 사회법학회 회원들과 함께 현장에 가 보았는데, 단대리 쪽 공동묘지 옆에는 상수도나 하수도가 없는 것은 물론 화장실마저 없어 아무데나 버려져 있는 분뇨로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 곳에다 천막을 치고 기어 들어갔다 기어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기 전에 그냥 맥이 빠졌다. 폭동을 일으킬 힘이 없는 무기력이 문제일 뿐 폭동이라도 일으킬 힘이 있다면 폭동이 아니라 전쟁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71년 1학기가 끝나고 박정희 정권과 제대로 한판 붙을 2학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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