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도 가을이 찾아 들었다. 단풍이 꼭대기부터 산을 물들이며 내려오더니 벌써 6부 능선 위로는 녹음의 흔적이 간 데 없다. 지리산의 가을 하면 으레 피아골 계곡의 불타는 단풍을 떠올리지만, 칠선 계곡의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단풍이야말로 일품이다.
칠선 계곡은 설악산 천불동 계곡, 한라산 탐라 계곡과 함께 국내 3대 계곡으로 꼽힌다. 사시사철 맑고 아름답지만 7개 폭포와 33개 소(沼)에 파란 하늘과 울긋불긋한 산 그림자가 어리고 단풍잎이 물위에 떠서 흐르는 이 맘 때가 으뜸이다.
폭포와 소(沼)에 어린 단풍
그러나 칠선 계곡은 아무 때나,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겨울에는 온통 눈으로 덮이고 여름에는 계곡물이 넘쳐서 늦봄과 가을에만 안전한 산행을 할 수 있다. 더구나 10년 동안 출입을 통제했다가 지난해부터 제한된 시기에 제한된 인원만 탐방을 허용하는 예약 가이드제를 시행, 1년에 1,800명 정도만 칠선 계곡을 찾을 수 있다.
가파르게 경사진 골짜기 입구에 추성 마을이 있다. 이곳 주민들은 옛날 에는 화전을 일궈 담배와 감자 농사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지금은 등산객을 상대로 민박을 하거나 토종 꿀, 고로쇠 수액 등을 팔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추성 마을에서 오른편으로 돌아 오르면 오래된 호두나무들이 반기는 두지동 마을에 이른다. 쌀을 담는 뒤주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여기서 4km쯤 올라가면 일곱 선녀가 목욕했다는 선녀탕을 만난다. 선녀에게 연정을 품은 곰과 선녀를 도운 사향노루가 나오는 설화도 있다. 1964년의 신문 사설에도 지리산 사향노루와 물오리 떼가 언급됐을 정도로 사향노루는 각별했던 존재였다.
선녀탕에서 천왕봉 방향으로 200m 가량 올라가면 제일 예쁜 선녀인 옥녀가 따로 목욕을 했다는 옥녀탕이 있고,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하늘로 날아갔다는, 칠선 계곡에서 가장 크고 깊은 비선담(飛仙潭)이 나온다. 초록빛 물이 불그스레한 산과 이루는 대비가 선명하다.
칠선 계곡은 역시 폭포와 소가 최고다. 맨 처음 계곡 중간 지점에서 만나는 칠선 폭포는 남성적 힘으로 넘친다. 조금 더 오르면 칠선 계곡에서 가장 큰 대륙 폭포, 거기서 다시 조금 더 가면 하늘 위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세 차례로 나눠 떨어지는 3층 폭포와 만난다. 그 다음이 칠선 계곡 마지막 폭포라는 뜻인 마폭포다. 여기까지 일곱 번이나 계곡을 가로질러야 한다. 계곡이 길고 험해서 옛날에는 길을 잃기 일쑤였다.
마폭포 위에서 한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할 거목을 만나게 된다. 천왕봉을 1.6㎞ 남긴 지점에 천년 세월을 견딘 주목 한 그루가 우뚝하다. 둘레가 2m80㎝가 넘는 노거수(老巨樹)다. 오랜 세월을 거치고도 여전히 정정한 것은 주목의 생육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간섭이 적었던 덕분이다.
마폭포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1㎞는 칠선 계곡 산행의 절정이라 할만하다.
암반과 급경사 지역으로 '죽음의 계곡'이란 말이 실감난다. 오르막 길을 오르다 보면 몸 속의 모든 노폐물과 함께 헛된 상념까지 빠져나간다. 칠선 계곡 산행은 그런 상쾌함으로 마무리된다.
맑디맑은 소중한 자연
칠선 계곡은 땃두릅나무 만병초 산겨릅나무 백작약 등 희귀식물과 사향노루 하늘다람쥐 등 멸종위기 동물의 서식지다. 한 달에 두어 차례 계곡을 오르내리며 전면 출입통제가 되살려낸 자연이 거의 손상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기쁨을 맛본다. 희귀식물의 안정된 서식도 그렇지만 탐방로 옆 큰 바위에 벨벳처럼 깔린 이끼, 세 아름도 넘을 거목들과 수시로 만나 인사를 나누는 즐거움을 무엇에 비할까.
지리산의 가을이 선물하는 맑디맑은 자연을 소중히 아끼며 즐겼으면 한다.
박은희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식물학 박사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