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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愛] CJ제일제당 쌀 가공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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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愛] CJ제일제당 쌀 가공연구팀

입력
2009.10.1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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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 정확히 무슨 종목인지, 메달을 몇 개 땄는지 보다 그 가녀린 몸과 그가 했다는 말이 뇌리에 오래 남았다.

" '라면만' 먹고 달렸어요." 훗날 과장 및 각색으로 밝혀졌지만 그는 오래도록 '라면소녀'였다. 라면의 상징은 여전히 건재하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몸서리치는 고독의 대명사, 그것이 '라면만'이다.

언제부턴가 라면이 친구를 얻었다. 운동선수와 밑바닥 연예지망생의 성공담, 기러기아빠의 애잔한 사연을 돋보이게 하는 감초는 이렇다.

"라면과 햇반으로 끼니를 때웠어요." 역시 온전한 밥을 얻어먹지 못할 정도로 곤궁했다는 비유다. 라면 홀로 나설 때보다 배가되는 현실감, 시대상을 반영한 구색 맞추기 정도 되겠다.

라면은 그렇다 치고, 엄연한 밥임에도 밥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즉석밥 '햇반'의 처지는 오죽할까. '밥을 밥이라 여기지 않는' 세태가 야속할 법하다.

그 밥을 짓는 CJ제일제당의 '쌀 가공연구팀'은 발끈한다. 최고의 밥맛을 자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괜한 오해만 한다. 그들의 하소연을 더 들어보자.

밥 짓는 게 대수냐?

주부들은 삼시세끼 매일 짓는 밥, 그들에겐 '연구'라는 거창한 딱지가 붙어있다. 제품 출시가 10년이 넘었으니 이골이 났을 법도 한데 주야장천 연구다.

매일 20개, 1년이면 1만개의 햇반을 시식한다. 그것도 맨밥으로. "저탄수화물 식이요법을 하는 시대에 부러 체지방을 쌓고 있다"(정수연 연구원)는 푸념이 절로 나온다.

"정해진 매뉴얼대로만 찍어내면 되는 거 아닌가" 했더니 "쌀은 하나의 생물"(김태형 연구원)이란 화두를 던진다. "걔(쌀)가 공산품처럼 딱 고정된 게 아니거든요. 같은 지역의 쌀을 써도 해마다 질이 달라지고, 보관 중에도 성질이 변하니 그때마다 공정조건을 바꿔야 해요."(정효영 연구원) 한결같은 밥맛(품질)의 유지가 연구의 8할인 셈이다.

그래도 의문이 생긴다. 밥맛이야 다 비슷할 텐데, 굳이 공을 들일 필요가 있나. 어차피 한끼 대용으로 후딱 해치워지는 팔자를 지닌 것을. 웬걸, "특히 주부들은 까다로워서 열 처리를 0.5초만 늘리거나 줄여도 '찰기가 떨어졌네, 씹히는 느낌이 안 좋네'라고 항의를 할 정도"(오예진 연구원)란다. 어쩌면 적(敵)일 수도 있는 주부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한, 혹은 능가하기 위한 노력이 그들의 숙명인 것이다.

연구는 산지부터 이뤄진다. 좋은 햅쌀 1년치를 고르기 위해 방방곡곡 누비며 농민들과 부대낀다. 흉작이 들면 농민처럼 걱정하고, 쌀 소비에 일조한다는 보람도 있다.

돌아와선 각종 데이터를 뽑아 꼼꼼히 분석한다. 해당 쌀의 특성에 맞게 불리는 시간, 열처리 조건 등을 다시 잡는 작업은 단순반복처럼 보여도 섬세하고 중대하다.

신제품 개발도 담당한다. '쌀눈가득햇반'은 행여라도 각 공정 중에 쌀눈이 떨어질까 봐 일일이 셌고, '검정콩밥'은 콩 껍질이 벗겨질까 봐 노심초사였다. "집에서 짓는 밥이야 한두 톨 쌀눈이 떨어지고, 콩 껍질이 뭉개져도 그만이지만 엄연한 상품으로 나온 햇반은 완전무결해야 한다"(정효영)는 것.

외형은 가공식품이지만 내면은 농산물에 대한 애정과 부단한 노력이 스며있다는 얘기다. 쌀을 얼마나 씻었던지 쌀뜨물 때문에 결혼반지가 하얗게 변색됐지만 밥맛은 10년 넘게 변함이 없단다.

수시로 쌀 포대를 나르고, 사우나마냥 더운 실험실을 견뎌야 하지만 동네 재활용쓰레기통에 햇반 빈 껍데기가 가득하면 피로가 싹 가신다.

방부제를 넣는다고요?

햇반의 재료는 쌀과 물이 전부다. 딱 두 가지뿐이니 품질관리 및 유지, 신제품 개발도 쉽지 않을 터. 그런데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떻게 밥이 6개월 이상 상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대표적이다. 일각에선 몰래 방부제를 넣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의혹마저 제기된다.

궁금할 법한 햇반의 제작과정은 이렇다. '도정→세미(쌀 씻기)→침질(불리기)→용기 담기→열처리→가압→살균→물 붓기→취반(밥 짓기)→포장→뜸 들이기→냉각.'

일반 밥짓기 과정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열처리 가압 살균 등을 통해 대기 중의 균을 완전히 제거해 무균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오래도록 제 맛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원들은 즉석밥보다 '무균밥'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즉 "비닐에 구멍이 생기면 균이 들어가 상할 수 있지만 표면이 탱탱한 걸 고르면 아무 문제 없다"(정우영 연구원)는 설명이다.

심지어 콩기름(유화제)를 발라서 햇반에서 윤기가 난다는 오해도 눌어붙어있다. "거대한 밥솥에서 밥을 지어 각 용기에 더는 게 아니라, 쌀을 햇반 용기에 담은 채로 직접 짓는 걸 신기해하는 고객도 있다"(정수연)고 했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소수의 지적은 용기냄새에 워낙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란다. 물론 밥 품질엔 아무 해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 모든 오해들은 최고의 밥맛을 추구하는 연구원들의 숨겨진 정성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찰기와 끈적거림, 구수한 맛, 형태, 윤기 등 밥맛의 완전비율을 찾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니까. 다른 건 몰라도 방부제를 넣는다는 누명은 더 이상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직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오 연구원이 결정적인 일화를 들려줬다. "아이 밥을 못 챙겨줘서 유치원 교사한테 햇반을 몇 개 줬더니 이런 걸 어찌 먹이느냐는 투로 '아 제가 지어 먹일게요'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만드니까, 그냥 먹이세요' 했죠." 애지중지하는 자식에게도 늘 먹이는 음식이라는데, 무슨 살을 더 붙이랴.

휴가나 야유회 MT 등 놀러만 갔다 하면 이들에게 돌아오는 미션. "밥 진짜 잘하겠다. 밥 좀 해라." 이제 지긋지긋하단다. 넌지시 밥 잘 짓는 비법을 물었다. "햇반 드세요!" 뜸을 잘 들인 자신감이 아주 차지게 익었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사진=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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