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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여성 한국어 겨루기/ "문제 풀며 타국살이 恨도 풀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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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여성 한국어 겨루기/ "문제 풀며 타국살이 恨도 풀었어요"

입력
2009.10.1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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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서울 송파구청 4층 강당 무대엔 지름이 1m도 넘는 황금색 종 모형이 달려 있었다. 그 밑에 류리리(23)씨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최후의 문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 하얼빈 출신의 한족(漢族)인 류씨는 지난해 건축설계사인 한국인 남편 김태희(42)씨를 만나 한국에 왔다.

한국어를 한마디도 모른 채 결혼한 중국 새댁의 지난 1년은 가히 '말과의 전쟁'이었다. 하루빨리 남편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조바심에 임신한 몸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국어 교실을 찾았다.

곧 태어날 아이에게 아빠 나라 말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남편과 밤늦게까지 과외 공부를 했다. 그간의 노력을 돌이켜보니 류씨는 머리 위에 매달린 추를 흔들어 종을 울리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남편 김씨를 비롯, 무대 앞으로 모여든 국제결혼 가족들이 보내는 침묵의 성원 속에 문제가 출제됐다. "다음에 공통으로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요? 발 없는 ○이 천리 간다, 가는 ○이 고와야 오는 ○도 곱다." 남편에게 잠시 눈길을 주던 류씨는 곧 하얀색 칠판에 망설임 없이 답을 적어 올렸다.

"'말'이라고 적었네요. 정답입니다!" 이민 온 지 채 1년이 안된 류씨가 '다문화 골든벨' 초대 우승자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타종 소리와 청중의 환호가 뒤섞여 강당을 울렸고, 류씨는 남편에게 안겨 감격의 눈물을 보였다.

송파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이하 지원센터)가 주최한 이날 '도전! 다문화 골든벨' 행사는 관내 결혼 이주 여성 및 가족 2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송파구에 사는 결혼 이주 여성은 1,500여 명으로, 서울에서 영등포구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가정이 많다 보니 집값이 상대적으로 낮은 마천동, 거여동 등에 주로 거주한다. 이주여성이 늘어남에 따라 송파구는 2007년부터 이들에게 한국어, 육아, 요리 등을 가르치는 지원센터를 구청에 설치해 운영 중이다.

모 방송국의 '골든벨' 프로그램 형식을 빌린 이날 행사는 한국어 초심자들이 주인공이었다. 이민 온 지 얼마 안돼 한국어가 서툰 여성이 남편 혹은 한국어에 능숙한 '선배'와 한 조를 이뤄 퀴즈 예선에 도전했다.

'추석이나 설날에 자주 입는 한국의 전통 의상은?' '한글을 만든 조선시대 왕은?' 등 내국인에겐 쉽지만 외국에서 온 새댁에겐 녹록지 않은 문제들이 거듭되면서 120명의 도전자로 가득했던 바둑판 모양 좌석은 빠르게 비어갔다. 30개 조가 남자, 남편과 선배들은 빠지고 초심자끼리 우승을 놓고 다투는 최종 예선이 시작됐다.

정답이 발표될 때마다 환호와 탄식이 교차했지만 양측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껍질을 벗겨 말린 감'을 묻는 문제에 '꽃감'이라고 답했다가 탈락한 참가자는 "엄마"를 연호하며 응원하던 아들을 꼭 안아주었다. 우에(25ㆍ베트남)씨는 문제를 풀다 말고 어린 아들의 흘러내린 바지를 재빨리 추어올리고 제자리로 뛰어가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가족 야유회 같은 분위기였다.

많은 참가자에겐 우승보다 수다가 더 중요한 듯했다. 모국을 떠나 한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것만으로 금세 열띤 대화가 이뤄졌다. 언어 문제는 이들이 가장 먼저 꼽는 한국 생활의 고충이다. 히라마쓰 미에(46ㆍ일본)씨는 "말이 안 통하다 보니 시어머니를 이해하는데 9년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2000년 초반에 결혼한 그녀는 신혼집 열쇠를 갖고 수시로 집에 들르는 시어머니와 적잖은 고부 갈등을 겪었다. 나중에야 시어머니의 잦은 방문이 타향살이 하는 며느리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이었음을 알고 깊은 후회와 감사를 느꼈다고 한다.

필리핀에서 온 카렌(26)씨는 "엄마가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밝아야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임신을 미루고 있다"고 말했다.

결혼 3년차인 에에딴(36ㆍ미얀마)씨는 언어 장벽 앞에 우울증까지 앓았다고 했다. 종교 갈등을 피하려 기독교 신자인 시어머니가 올 때마다 집안에 모셔놓던 불상을 치우는 일도 정신적 부담이 됐다.

남편 김영수(40)씨는 "일이 바빠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가 적다 보니 아내의 고통을 잘 헤아리지 못했다"며 "아내가 구청 지원센터에서 결혼 이주자 친구들을 사귀면서 한국어 실력도 좋아지고 성격도 밝아졌다"고 말했다.

나혜숙 지원센터 팀장은 "결혼 이민자 가족 간 교류는 이들의 한국생활 적응에 큰 도움이 된다"며 "이번 골든벨 행사도 200~300명에 머물고 있는 센터 이용자를 늘리기 위해 기획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박철현기자 k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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