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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들의 절망을 연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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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들의 절망을 연민하라

입력
2009.10.1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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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 여고를 거쳐 여대에 들어갔을 때 대학생이 된 걸 축하한 이들은 가족뿐,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 처지를 가엾게 여겼다. 학교 앞에 책방은 두 갠데 옷가게는 100개가 넘는 학교를 어떻게 다니느냐며, 골 빈 여대생들과 함께 생활해야 할 나를 안쓰러워하고 남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기회를 잃은 것을 동정했다. 친구들의 말이 아니라도 나 역시 책은 안 읽고 모양이나 내는 ‘여대’생이 된 게 부끄럽고 싫었다. 입학한 그날부터 휴학을 하고 다시 입시공부를 할까 고민도 했지만 지긋지긋한 그 공부를 다시 할 자신이 없었다.

별 수 없이 입이 댓 발이나 나와서 우울한 신입생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교육학 수업 시간, 중년의 여교수님은 교육학이 어떤 학문인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10년 넘게 철학을 공부하다가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남녀를 아우른 인간(Human)이 아니라 남성 인간(Man)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여성까지 포함한 인간학을 하기 위해 뒤늦게 교육학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여자로 태어나 여자 학교를 다니며 여자로 근 20년을 살았지만 ‘내가 여자구나!’라고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여성으로 사고하기보다는 인간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하던 나에게, 교수님의 말은 내가 생각하는 인간과 세상이 생각하는 인간이 다를 수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여성인 내가 생각하는 인간과 남성인 그가 생각하는 인간이 다를 수 있다는 것, 그건 놀랍고 섬뜩한 깨달음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남녀가 함께 어울리는 세상에 나왔을 때 그 깨달음은 현실이 되었다. 비일비재한 성적 모욕과 차별의 태반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장난이거나 실수였는데, 그래서 더 괴로웠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고, 그것이 잘못임을 일깨우면 무안해하거나 화를 냈다. 모르고 짓는 죄가 가장 무섭다더니 과연 그랬다. 자신이 죄를 지은 줄 모르니 반성을 할 수도, 교정을 할 수도 없었다. 잘못은 거듭되면서 구조가 되었고, 구조는 다시 차별을 합리화했다.

얼마 전 신문에서 한국의 20대 여성 자살자 수가 유례없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세계적으로 자살은 여성보다 남성이 2배 정도 많은데 최근 들어 한국에선 20대 여성의 자살이 부쩍 늘어서, 2008년 20대 자살자 1,574명 중 여성이 802명으로 772명인 남성보다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 전해와 비교하면 남성은 24명이 줄어든 반면 여성은 48명이 늘어난 수치였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여자들은 군대도 안 가면서 왜 그 젊고 아름다운 나이에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

한국 여성의 대학진학률은 83%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1위지만, 대졸 이상 학력자 가운데 일하는 여성은 59%로 최하위 수준이다. 더구나 그 셋 중 둘은 비정규직이고, 월급 역시 남성의 61%에 불과하다.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남자와 똑같은 인간인 줄 알고 공부했지만 막상 사회에 나와서 인간이라 해도 다 같은 인간이 아님을 알았을 때 느끼는 절망감, 혹 그 절망감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닐까.

20대건 60대건, 여성이건 남성이건 삶이 무겁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무겁고 가벼움을 따지기 전에 같은 짐을 진 존재로서 서로를 연민하는 것, 그것이 인정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람과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다르지 않다면 말이다.

김이경 소설가ㆍ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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