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빌딩과 자동차가 즐비한 삭막한 강남 거리를 걷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답답한 공간에 한줄기 시원한 숨결을 불어넣는 공간이 바로 양재천이다. 서초구 영동1교에서 벗어나 양재천 쪽으로 내려서니 탁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다리 밑을 흐르는 양재천 주변은 갈대와 억새, 갯버들로 무성해 풀 냄새가 가득했다. 양재천 양쪽에 조성된 산책로 겸 자전거도로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활기차 보인다.
본래 양재천 자전거 길은 하천 바로 옆에 자리잡았지만 지금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하천 오염을 막기 위해 옮겨 놓은 것이다. 하천과 자전거 길 사이에는 수질정화기능이 있는 갯버들과 물억새, 갈대를 심어두었다. 수심이 얕은 하천 부근은 대부분 새들 차지다.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가 떼지어 먹이사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과천 방향 상류로 올라가면 물소리가 점점 커져 산골에 온듯한 착각에 빠진다. 팔뚝만한 잉어들이 상류로 올라가기 위해 힘겹게 물살을 가르는 모습과 이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왜가리와 백로도 이 곳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대부분 한강에서 탄천을 거쳐 올라온 것들이다.
영동1교와 영동2교 사이에 조성된 '연인의 거리' 부근에는 박하꽃 향기로 가득 차 있다. 옷에 잘 달라붙는 초록색 도꼬마리씨와 보라색 붓꽃, 빨간색 여뀌도 양재천의 식구다. 하지만 자전거도로 양쪽 언덕에는 불청객 환삼덩굴이 어김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양재천에는 2급수에서 사는 누치를 비롯해 버들매치 동사리 피라미 등 20여종의 어류와 150여종의 식물들이 터를 잡고 있다. 두루미 청둥오리 같은 조류와 두꺼비와 너구리 등의 동물도 발견된다. 가끔씩 너구리와 뱀도 수시로 보인다.
지금의 양재천은 더 이상 동식물만의 공간은 아니다. 양재천 양쪽의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는 지역주민들의 자랑거리이다. 과천에서 강남까지 이어지는 자전거도로는 2007년 개통된 후 지금은 출퇴근족도 적지 않다.
매주 수요일에는 관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생태교육이 진행된다. 수질정화시설은 학생들이 들러야 할 필수코스다. 14일 이 곳을 찾은 잠원초등학교 학생 80여명도 연신 "신기하다"고 조잘거렸다.
상류쪽에선 시골정취가 물씬 풍기는 반면 하류에서는 타워팰리스 등 고층건물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수영장 수변무대 인라인스케이트장 체력단련소 등 문화ㆍ체육시설도 보인다. 영동1교와 2교 사이에 설치된 LED(발광다이오드) 조명등과 생태학습장으로 인기 있는 '아이리스원' 등 이색적인 볼거리도 있다.
양재천 시설물 중 특이한 것은 돌 붙임 호안이다. 커다란 바위를 강 양쪽에 옹기종기 배치해 바위 사이로 크고 작은 공간을 만든 것이다. 홍수 때는 물이 스며들고 가뭄 때는 물이 흘러나오는 저장고 역할을 한다.
물고기 산란 장소로 활용되는 등 생명체들의 서식공간이기도 하다. 양재천 부근에서만 20년 살았다는 생태해설사 이상열(68)씨는 "호안 블록 교체는 정말 잘한 일이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양재천은 강남 개발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강남을 관통하다 보니 자연히 개발도 일찍 시작됐다. 본래 구불구불한 자연하천이었지만 1970년대 한강개발사업과 주변일대의 개발로 직강화됐다. 이 때까지만 해도 양재천 합류부에는 여울이 형성돼 백로가 자주 찾아온 탓에 학여울이란 명칭이 붙을 정도로 물이 맑았다.
하지만 급격한 개발과 직강화 공사의 휴유증으로 양재천은 한동안 '죽음의 하천'이었다. 양재천을 관리하는 서초구 재난치수과 박상권 과장은 "하수처리시설과 정화시설도 제대로 안 갖춰져 있는 상태에서 생활폐수가 그대로 쏟아져 악취가 진동했다"고 전했다. 양재천 오염 때문에 이사 오기를 꺼리고 집값이 떨어졌다.
지금도 양재천 양쪽 곳곳에 자리잡은 생활하수 통로가 있었다. 가림막을 걷어 내니 역한 냄새가 나는 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이 물은 과거에 양재천에 그대로 유입됐지만 지금은 자전거 도로 밑에 설치된 관을 통해 탄천하수처리장으로 간다.
1995년부터 직강화 공사의 상징이던 시멘트 블록이 제거되고 1995년부터 호안에 돌과 나무 등이 생기면서 양재천은 '자연형 하천 1호'로 거듭났다. 지금의 청계천도 양재천 모델이 밑바탕이 됐다.
하지만 양재천 생태계가 튼실해지려면 아직도 보완돼야 할 것이 많다는 지적이다. 이씨는 "가까운 우면산과 생태계가 이어져야 하고 각종 편의시설과 체육시설들도 줄여야 더 많은 동식물들이 제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 양재천 맑게 해주는 수질정화시설
양재천은 5,6년 전만 해도 4~5급수였다. 근처에만 가도 냄새가 진동했다. 수질이 2~3급수 수준까지 개선된 것은 서초구와 강남구에 각각 설치된 수질정화시설 덕분이다. 양재천은 강남 지역을 가로지르는 전형적인 도심하천으로 주변에 오염원이 유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양재천 하류 쪽의 강남구 수질정화시설이 1997년 문을 연데 이어 서초구도 2003년 교원단체총연합회 건물 건너편에 30억원을 들여 정화시설을 완공했다. 서울의 한강 지천에 조성된 유일한 정화시설이다. 아무리 탁한 물도 정화시설을 통과하면 수질이 2급수 수준으로 개선된다.
물이 맑아지는 원리는 자연의 자정작용과 비슷하다. 화학물질 첨가 없이 이뤄진다. 서초구 수질정화시설의 경우 양재천 둔치 지하에 거대한 자갈밭을 매설했다. 가로 19.4m, 세로 12.2m 높이 4.5m 크기의 자갈밭 8개가 일렬로 배치돼 상류에서 내려온 물이 90분 동안 자갈밭을 통과한 후 하류로 다시 배출된다.
정화는 3단계에 걸쳐 이뤄지는데 탁한 물이 수질정화시설로 유입되면 하천수중의 오염물질이 자갈 사이 공간을 흐르면서 자갈과 접촉해 침전한다. 오염물질의 전기적 성질과 자갈 표면에 부착된 미생물의 점성에 의해 부유물이 흡착되는 단계가 이어진다.
다음은 미생물이 오염물질을 먹이로 섭취해 물과 탄산가스로 분해해 배출한다. 슬러지(침전물)는 펌프를 이용해 탄천 하수종말처리장으로 이동시켜 처리한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 3만2,000㎥ 물이 쉴새 없이 처리돼 수질을 맑게 유지한다.
하지만 정화시설이 수질을 개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상류에서 물이 많이 밀려오거나 비가 많이 오면 처리용량을 넘어서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양재천을 끼고 있는 과천시, 강남구, 서초구는 양재천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강철원 기자 strong@hk.co.kr
사진=홍인기기자 hongi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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