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색의 상징은 단풍 아니면 억새라 여겼다. 울긋불긋 눈을 휘황하게 하는 단풍이나, 맑은 햇살을 눈부신 은빛으로 부숴 내는 억새만으로도 가을은 충만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가을빛이 있었다. 단풍 억새와 겨뤄 결코 뒤지지 않을 곱고 그윽한 그 빛. 푸른 밤 달빛을 닮은 꽃, 가을 안개처럼 분분이 피어나는 꽃, 순백의 구절초가 전하는 추색(秋色)이다.
김용택 시인이 '구절초 꽃 피면 가을 오고요, 구절초 꽃이 지면 가을 가는데'라 했고, 박용래 시인이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이라고 노래한 것이 구절초다.
개미취 쑥부쟁이 개망초와 비슷해 보통 들국화로 통하지만 줄기 끝에 여러 송이의 꽃이 피는 다른 것들과 달리 한 송이만 피고, 잎 가장자리가 갈라지는 게 특징이다. 5월 단오에는 줄기가 5마디가 되고 음력 9월 9일(중양절)에는 9마디가 된다고 해 구절초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한 송이 만으로도 아름답지만 무리를 지으면 더욱 큰 감동을 선사하는 게 꽃이다. 새색시처럼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구절초가 큰 군락을 이뤄 피어난 곳들이 있다. 하얀 가을이 풍덩 빠져 있는 곳들이다.
옥정호 구절초 테마공원
가을 안개 곱게 내려앉는 섬진강 상류, 옥정호 주변에 구절초가 큰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전북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 산자락이다. 매년 이맘때면 '비밀의 화원'이 열린다.
바로 옆 옥정호의 물안개가 밀려드는 가을 새벽녘, 붉은 소나무 아래 가득 핀 구절초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정읍시가 소나무 산 12만㎡를 정비, 6만㎡에 구절초를 심어 만든 구절초 테마공원이다.
소나무와 구절초가 어우러진 공원의 산책로로 들어섰다. 천천히 꽃밭을 거닐었다. 그동안 찌뿌듯했던 몸이 금세 가벼워졌다. 조용한 선방에서 개운한 국화차 한잔 마신 것 같다. 화한 느낌이 온 몸으로 번졌다. 구절초에 솔향까지 더했으니 상쾌함이 두 배다.
6일 시작했던 '옥정호 구절초 축제'는 11일 끝났다. 하지만 만개한 구절초의 아름다움은 이번 주말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공원은 정읍시 산내면 소재지에서 순창군 쌍치 방향으로 2km가량 떨어져 있다. 전주에서 40분 거리고, 광주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온다면 태인 나들목에서 나와 칠보 방향으로 30분 가면 된다. 옥정호숫가의 민물매운탕이 유명하고 15분 거리에는 싼값에 쇠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산외한우거리가 있다.
공원 입구인 산내면사무소가 있는 능교2리는 매운탕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이중 산내매운탕은 맛의 고장 정읍서도 알아주는 집이다. 붕어찜과 매운탕 2가지만 한다. 두충 감초 엄나무 갈근 등 한약재가 들어간 붕어찜과 매운탕은 칼칼하면서도 뒷맛이 깔끔하다. (063)538_4067
구절초 군락의 원조 공주 영평사
구절초 군락지의 원조를 자처하는 사찰이 있다. 충남 공주시 장기면 장군산 자락에 들어선 영평사다. 주지 환성 스님이 "그 청초하고 고결하고 그윽한 멋에 반해" 20년 가까이 사찰 주변을 구절초로 가꿔 왔다. 푸른 잔디의 절 마당과 대웅전 기와를 배경으로 눈부시도록 하얗게 수를 놓은 구절초 군락이 매혹적이다.
스님은 "수행하던 때 구절초를 봤는데 청초한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꽃말이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나 혼자 보기 아까워 축제를 열었는데 오시는 분들마다 행복해진다고 말씀하더라"고 했다.
스님은 "차나 술을 빚거나 화전으로 부칠 수도 있는 구절초는 벌레가 끼질 않아 약 한번 치지 않고 기르는 절대 안전 식품이기도 하다"고 했다.
18일까지 열리는 '영평사 구절초 축제'는 올해로 10회째다. 처음엔 10주년에 맞춰 다채롭게 공연 및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했으나 신종플루 때문에 산사 음악회 등 공연을 취소했다.
천연 비누 만들기, 사진 전시회, 108참회 체험, 구절초 차 마시기 등 상설 프로그램은 정상적으로 진행된다. 특히 축제 기간 구절초 꽃차와 조미료를 넣지 않고 죽염수로만 간을 한 웰빙 국수가 무료로 제공되니 놓치지 말자. 영평사 종무소 (041)857_1854
금산 풍물 광장
대전_통영고속도로 충남 금산군의 인삼랜드 하행선 휴게소에 들어서면 어디선가 들국화 향이 번져 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 향의 진원지를 찾아 코를 킁킁거리며 찾아 나서면 휴게소 뒤편 넓은 평원 가득 하얀 꽃 세상이 펼쳐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풍물광장을 가득 메운 구절초 군락이다. 2만1,000㎡의 넓은 땅이 온통 구절초로만 가득하다. 휴게소에서 철 사다리를 통해 꽃밭으로 내려갈 수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에 들린 이들뿐 아니라 추부IC나 금산IC로 나와 일부러 찾는 이들도 많다. 5년 넘게 계속 구절초 군락으로 피어나 이젠 제법 이름이 났다. 이 들판의 꽃은 이번 주말이 마지막을 이룰 것이다.
정읍·공주·금산= 글·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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