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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술 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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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술 핑계

입력
2009.10.15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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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처럼 술에 관대한 나라는 없다"고들 하지만 사실 역사상 술만큼 죄질에 비해 과분한 대접을 받아온 것은 없다.'석 잔이면 큰 도를 통하고/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며 아예 대놓고 폭음을 권했던 이백이야 늘 주취 상태였으니 그렇다 쳐도, 엄격한 도덕론자로 유명한 칸트조차 "술은 입을 경쾌하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하는 도덕적 물질"이라고 (틀림없이 맨 정신에) 말한 걸 보면 술 예찬엔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 압권은 그리스 철학자 키케로다. "술 못 먹는 자에겐 사리분별을 기대하지 말라"고 충고했을 정도니까.

▦인식이 이렇다 보니 일상을 넘어, 엄정하게 잘잘못을 가리는 법에서조차 술은 특별대접을 받는 존재가 됐다. 우리 형법10조의 '심신장애자에 대한 형 감면' 규정이 그것이다. 여기서 심신은 心身(마음과 몸)이 아닌, 心神(마음과 정신)이니 심신장애는 정신적 이상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선천적 장애뿐 아니라 술 마약 따위로 인한 후천적 일시적 정신이상 상태까지 포함한다. 쉽게 말해 범죄자가 만취해 완전히 정신줄을 놓아버린 상태였다면 처벌할 수 없고, 좀 덜 취해 간신히 의식이 있는 정도였다면 형을 깎아줘야 한다는 규정이다.

▦그러니 범법자마다 술 핑계를 대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 됐다.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증거와 정황이 딱 떨어져 더 이상 범행을 부인할 수 없게 되면 변호사들이 빼드는 전가의 보도가 "피고는 당시 만취상태였지요?"라는 질문이다. 피해자로서야 억울하고 기막히지만 사실 이건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전체적인 법적 균형과 안정성을 고려하고 구체적으로는 고의ㆍ과실, 작위ㆍ부작위 등을 복잡하게 따져 처벌의 적정성을 고민해야 하는 사안이다. 요컨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을 실제 다 그렇게 죽이는 건 다른 문제인 것이다.

▦조두순 사건의 '가벼운' 형량이 국정감사에서도 이슈가 됐다. 핵심은 이런 악질적 범죄자에게까지 술 핑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경우엔 고금 현인들의 낭만적 음주 인식보다는 '술 먹으면 개'라는 우리네의 거친 정서가 더 적절한 듯 싶다. 이 속담엔 어떤 동정이나 용서의 감정도 개입돼 있지 않으니까. 물론 형량을 높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지라도 차제에 일반의 법 감정과 너무 동떨어진 경우에 한해선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시도가 필요한 것 같다. 마침 해당 법원도 음주 감경제도 폐지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답한 바 있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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