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삶과 문화] 면역력 없는 '무균사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면역력 없는 '무균사회'

입력
2009.10.15 00:40
0 0

독일 통일과정을 공부하면서 '모두가 함께 잘사는 사회'라는 아름다운 이상을 내세운 동독이 왜 허무하게 무너지고 곧바로 서독에 흡수되고 말았는가를 줄곧 천착했다. 내가 찾아낸 답은 동독은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 순수한 사회 즉, 면역체계가 극히 미약한 세계였기에 외부에서 바이러스가 침입하자 그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는 분석이다.

동독이 면역력이 약한 무균상태의 사회가 된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맹신과 정치지도자들의 오만 때문이었다. 독일 땅에 최초로 노동자 농민의 나라를 세웠다는긍지나 모두가 잘사는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던 위정자들은 동독의 현실이나 사회주의의 문제를 비판하는 이들을 불평ㆍ 불만자이거나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배신자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서독으로 추방하였다.

동독 지식인들은 좀 더 나은 사회주의를 실현해 보자는 충정에서 동독 사회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그러한 비판을 자신들에 대한 도전, 더 나아가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하였다. 사회주의는 절대선이고 그것에 대한 비판은 악이라는 논리가 바탕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주의 현실을 비판하는 이들은 자동적으로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배신자가 되었다.

이러한 생각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오로지 하나의 기준만이 통용된다.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가 아닌가가 선과 악을 나누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 이데올로기가 당위성을 지니면 지닐수록 그를 따르지 않는 생각과 사람을 배제하는 정도가 심해진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동독체제가 몰락하기에 이른 싹이 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한 사회가 하나의 가치 기준을 내세우며 그것과 다른 것들을 이단으로 취급할 때, 그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조용하고 순수해 보이지만 외부의 자그마한 압력에도 쉽게 넘어져버리는 허약한 체질이 된다.

동독의 경우 절대선인 사회주의와 다른 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었다. 동독 현실에 비판적 태도를 보인 지식인과 작가를 서독으로 추방하면서 위정자들은 "건강한 동독 민중의 신체에서 병든 팔다리를 고통 없이 절단함으로써 다시 건강해졌다"라고 설명하였다. 그 결과 동독 사회는 순수혈통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면역력은 현저히 떨어졌고, 베를린 장벽 개방과 함께 자본과 물질이라는 거대한 욕망 바이러스가 밀려오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에 비하면 서독 사회는 면역력이 강했다. 68 학생운동과 1970년대의 적군파 활동, 80년대의 녹색당 등장으로 격렬한 이념논쟁과 가치관의 대립을 경험하면서 서독 사회는 아주 강력한 면역 백신을 맞았기 때문이다. 격변을 거치며 서독 사회는 웬만한 반대 주장쯤은 함께 안고 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오히려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시켜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본주의 혐오자, 사회주의 찬양자, 통일 반대자들도 포용하고 공론의 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게 한 서독은 어떤 바이러스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체질을 갖게 되었다.

광화문과 시청 앞에 줄지어 서있는 경찰버스들이 다시 일상이 되고, 시국선언을 한 이들이 이런저런 불이익을 당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연예인들마저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아 방송에서 배제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면서 우리사회의 면역력이 자꾸 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형형색색의 가을 산이 왜 아름다운지 되새겨볼 일이다.

김용민 연세대 독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