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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상봉의 Fashion & Passion] <19> 10분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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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상봉의 Fashion & Passion] <19> 10분의 기적

입력
2009.10.14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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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내에 있는 아파트들의 특이한 구조중의 하나는 평면이 ㅁ자로 돼있고, 그 사이로 건물 안에 햇빛이 들어오는 작은 마당이 있다는 점이다.

이번 파리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매번 사용하던 레지던스 호텔 대신 컬렉션을 준비하는 스튜디오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아파트를 임대해 사용했다. 흥미로운 점은 지하 1층인데도 특이하게 마당이 지하까지 파여 있어 햇볕이 들어왔고, 거의 지하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이 아파트엔 예전 우리 다락방처럼 '메자닌'이라고 불리는 복층구조의 침실이 있었고, 그 아래 거실과 부엌, 화장실이 있는 구조였다. 크기는 약간 넓은 규모의 스튜디오(파리에서는 방이 없는 오피스텔 같은 구조의 아파트를 스튜디오라 부른다)라고 할 수 있다.

이 집의 주인은 검소하고 인텔리전트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하나하나 공간도 매우 효율적으로 잘 활용돼 있었고, 책장에는 아트북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매우 기분 좋은 아파트였다.

반면 컬렉션은 여태껏 7년 동안 파리에서 해왔지만 이번이 가장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될 것 같다. 여동생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발인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파리로 떠났다.

이 후 컬렉션을 준비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내가 지금껏 걸어온 길과 여동생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내내 복잡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순조롭게 출발한 컬렉션 준비도 예기치 못한 여러 변수들이 한꺼번에 발생해 긴장한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내 패션쇼가 열리는 파리 패션 위크의 둘째 날은 발렌시아가, 니나리찌, 발맹, 릭오웬스 등 개성이 넘치는 파워풀한 디자이너들의 쇼들이 진행되었다.

성향이 비슷한 디자이너들의 쇼가 같은 날 열렸기 때문에 모델 캐스팅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서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모델들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며 캐스팅 전쟁을 펼쳤다. 나도 마음에 드는 모델들의 퍼스트 옵션을 걸기 위해 캐스팅을 마무리하는 저녁이면 전화를 걸기에 바빴다.

이번 컬렉션에 맞춰 내가 캐스팅에 주안점을 둔 모델은 금발에 신비한 얼굴의 모델이었다. 금속의 조각품을 걸치고 등장하는 모델들은 역대 최고의 장편 SF소설로 꼽히는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을 바탕으로 1984년 데이빗린치 감독이 영화화 한 '듄(Dune)'을 연상시키는 기계적이면서 꾸미지 않은 내추럴한 분위기를 연출해야만 됐다.

이를 위해 사막을 연상시키는 베이지색의 코트들은 워싱을 해 낡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고, 메이크업도 사막을 연상시키는 누드 톤에 인공적인 회색의 터치를, 헤어스타일은 머리 뒤로 타원형으로 길게 우주적인 볼륨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엔 이전에 비해 헤어 메이크업 리허설에 오래 시간을 소비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번 쇼는 에펠탑 건너편에 위치한 파리 시립 근대미술관에서 열렸다. 이곳은 근대 미술의 걸작들이 전시돼 있는 조금 특별한 장소다.

인체를 통해서 조각과 패션이 만나는 이번 컬렉션과 매우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과연 국내라면 이런 전시작품들을 두고 컬렉션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는 근대 미술의 걸작들이 전시된 반대편 커다란 창가 쪽으로 33미터나 되는 긴 런웨이를 만들었다. 창문의 크기가 워낙 커 일정한 조도를 얻기 위해 큰 창문을 모두 막아야 했다.

그리고 갤러리에서 쇼를 하면서 감수해야만 됐던 또 한 가지는 애초에 패션쇼를 위해 만들어진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헤어 메이크업 장소로 쓸 수 있는 장소가 무대 뒤가 아닌 런웨이 건너편에 있었다.

그래서 모든 모델들이 관객들이 도착하기 1시간 전 모두 헤어메이크업을 완료해 무대로 돌아와야만 했다. 어수선한 번거로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컬렉션 전 리허설을 앞두고 시스템을 담당한 측에서 무선마이크 헤드셋을 챙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컬렉션이 시작되기 1초 전에 무선마이크가 도착해 간신히 쇼를 시작할 수가 있었지만 리허설을 하지 못해 사전에 기획한대로 제대로 연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은 구두에서 발생했다. 외국 모델들은 몸은 훨씬 날씬하지만 발 사이즈는 생각 외로 큰 경우가 많다. 무대로 나가기 직전 막상 구두에 발이 들어가지 않는 모델 중 구두 굽의 지퍼를 올리다 피를 흘려 휴지로 닦고 나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만 것이다.

컬렉션은 한 번 실수하면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완벽한 라이브다. 쇼가 끝난 후 인터뷰하면서 주저앉을 만큼 기력이 다 빠졌다. 그래서 매번 컬렉션을 마치고 파리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가졌던 스텝들과의 뒤풀이조차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컬렉션을 위해 밤을 새우며 준비한 긴 시간들을 위로하기엔 10분 남짓한 쇼는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다행히도 쇼가 끝난 후 무대로 걸어 나왔을 때 관객들의 함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르몽드에서 이번 컬렉션을 소개하면서 이상봉의 새로운 컬렉션이 시작됐다는 호평이 사진과 함께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나란히 게재되었다.

꼭 지옥과 천국을 오고 간 느낌이었다. 이런 반가운 소식들은 다시 한 번 멋진 쇼를 준비할 수 있는 큰 힘이 될 것이다. 3개월간 준비해 10분 만에 끝나는 컬렉션을 나는 '10분의 기적'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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