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경기 김포시의 앵글 공장에서 일하는 스리랑카 출신 크리산타(31)씨는 일요일 늦잠의 유혹을 물리치고 집을 나섰다. 그가 버스로 1시간 걸려 찾은 곳은 인천 부평구 부개동의 '이주노동자 건강센터 희망세상'(이하 희망세상). 주택가 대로변의 오래된 상가 건물 3층에 위치한 이곳은 '일요병원'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외국인 노동자 무료 진료소다.
일요일 아니면 짬을 낼 수 없고 진료비도 걱정돼 충치 치료를 미뤄왔던 크리산타씨에겐 그야말로 '맞춤 병원'이다. 역시 충치를 앓는 친구 디네시(30)씨와 함께 가장 먼저 진료 접수를 한 그는 "하루 빨리 낫고 싶어 먼 길에도 힘든 줄 모르겠다"고 말했다.
줄라이(37ㆍ필리핀)씨도 2주 만에 희망세상을 다시 찾았다. 그는 지난달 27일 치과 치료를 받으러 처음 왔다가 혈압이 200㎜Hg를 넘는 걸 발견하고 긴급 내과 치료를 받았다. 방치하다간 큰 화를 입을 만한 수준의 고혈압이었다. 의사 지시대로 2주 동안 몸무게를 3㎏이나 뺐다는 그는 식사량을 조절하라는 의료진의 충고에 "아, 알아요, 알아요"라고 서툰 한국어로 유쾌하게 답했다.
주민등록이 된 외국인만 5만명에 달하는 인천에서 희망세상은 외국인 노동자가 돈 걱정 없이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시립의료원, 적십자병원 등 병원 3곳도 불법체류자를 무료 진료하지만 신분증, 직장 경력증명서 등 까다로운 요구 조건이 있어 이용자가 적다.
희망세상에선 최초 접수비 1,000원만 내면 아무 조건 없이 매주 일요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치과, 내과, 외과, 한방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약도 무료로 탈 수 있다. 중국동포 이용일(36)씨는 "건강보험 혜택을 못 받는 동료들에게 이곳을 자주 소개해준다"고 말했다.
사실 몇 달 전만 해도 희망세상은 문 닫을 위기에 몰렸다. 희망세상의 전신은 인천 서구 가좌동의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에서 일요일마다 문을 열던 치과 진료소.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인천지부가 의료봉사 차원에서 2004년부터 운영해오던 곳이다.
그런데 인권센터에 660㎡(200평)의 널찍한 공간을 무상 임대해줬던 독지가가 재정난에 빠지면서 부득이하게 건물을 비워줘야 했다. 회비를 쪼개 한달 50만원의 운영비를 충당해왔던 의사회가 수천만원의 이전 비용을 감당하기란 불가능했다. 사무실 보증금 마련도 벅찬 인권센터에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강수남(85) 할머니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평소 다니는 부평구 일산동성당 주임신부로부터 진료소의 처지를 전해들은 할머니는 자기 소유의 상가 건물이 비어있다며 130㎡(40평) 넘는 장소를 거저 내줬다.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80만원은 받을 수 있는 상가였지만 강 할머니 가족은 "마침 빈 공간이 있어 좋은 일 하는 분들이 쓰도록 했을 뿐 거창한 뜻은 없다"며 몸을 낮췄다.
희소식이 또 있었다. 의료봉사 단체들이 진료소 운영에 힘을 보태겠다고 나선 것. '행동하는 의사회'가 한방 치료를, 인천시약사회가 약국 운영을 맡기로 했고, 간호와 접수 업무엔 참의료실천단이 나섰다. 뜻있는 지역 내과ㆍ외과 의사들도 의기투합해 희망세상은 종합병원 부럽지 않은 진용을 갖추게 됐다.
7월12일 옛 건물에서의 마지막 진료를 끝내자마자 의료진은 이사에 착수했다. 진료를 한 주도 거르고 싶지 않은데 평일엔 각자의 병원에서 근무해야 하니 일요일인 이날밖에 시간이 없었다.
추적대는 비를 맞으며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3층으로 치과 진료용 의자 등을 나르느라 녹초가 됐지만 덕분에 1주일 뒤 19일부터 새 단장한 진료소에서 환자를 맞을 수 있었다. 지난달 20일엔 늦은 개소식을 열고 건물 입구에 현판도 걸었다.
가구, 주물공장이 많은 인천 서부공단 지역을 떠나 한적한 주택가로 진료소를 옮겨온 터라 환자들이 오기 힘들 것이란 염려도 있었지만 입소문이 퍼지며 하루 30명 가량이 찾던 예전 수준을 회복하고 있다.
인천뿐 아니라 김포, 안산, 시흥, 의정부 등 외지 환자도 늘고 있다. 지난달 공장에서 허리를 다쳐 한방 물리치료를 받은 몽골인 블로르 에르덴(35)씨는 "건강보험이 있어도 치료비가 부담스럽고 휴일에나 병원 갈 짬이 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곳"이라고 말했다.
칸막이로 나뉜 공간 한 쪽을 내과의 이동훈(48)씨와 함께 쓰는 외과의 위성(48)씨는 "좁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환자를 볼 수 있어 참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동훈씨는 "환자 대부분이 경제적 취약계층이라 오랫동안 병을 키우다가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희망세상은 참여 단체의 출연에만 기대던 운영 방식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기부 후원자를 적극 찾아나설 계획이다. 박성표 대표는 "언제든 자립할 수 있도록 임대 보증금을 마련하고, 치아 보철치료 등 의료 서비스 수준을 높이려면 재정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중증 및 응급 환자를 다른 중대형 병원에 신속히 후송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희망세상의 주요 과제다.
이훈성기자
김혜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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